“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초대, 2대 대법원장으로 9년 3개월 동안 재직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1957년 12월 70세로 정년퇴임하면서 남긴 말이다. 사진은 1964년 1월 13일 77세로 별세한 가인의 장례식 모습이다.
가인은 청렴과 강직의 표상, 법관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는다. 가인의 청렴에 관한 일화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옷은 항상 광목으로 지은 한복과 두루마기 차림이었으며 고무신을 신었다.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하지 않아 잉크병이 얼 정도였다. 박봉을 견디다 못한 법관이 찾아오자 가인은 자신도 죽을 먹고 있다며 돌려보냈다. 부적절한 처신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요즘 법조인들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가인은 20세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죽음을 면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교수로 일하던 가인은 법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김상옥 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100건이 넘는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대법원장 재임 시절 가인은 이승만의 독재와 대립하며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가인은 청렴과 강직의 표상, 법관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는다. 가인의 청렴에 관한 일화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옷은 항상 광목으로 지은 한복과 두루마기 차림이었으며 고무신을 신었다.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하지 않아 잉크병이 얼 정도였다. 박봉을 견디다 못한 법관이 찾아오자 가인은 자신도 죽을 먹고 있다며 돌려보냈다. 부적절한 처신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요즘 법조인들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가인은 20세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죽음을 면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교수로 일하던 가인은 법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김상옥 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100건이 넘는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대법원장 재임 시절 가인은 이승만의 독재와 대립하며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2013-01-22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