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외상 장부/김성호 논설위원

[씨줄날줄] 외상 장부/김성호 논설위원

입력 2009-07-30 00:00
수정 2009-07-30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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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동네 가게마다 허름한 공책이 늘상 걸려 있곤 했다. 시골의 점방도, 도시의 점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름아닌 외상 장부이다. 물건을 집어들곤 ‘달아 놓으라.’는 한 마디만 남기면 됐다. 장부에 적었다가 대개 한달 단위로 몰아 결산하는 외상. 가게주인도 손님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던 그 거래는 지금 생각해도 흥미롭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주머니가 조금씩 두둑해지면서 사라져 간 우리의 추억속 외상 장부. 지금이야 신용카드 영수증쯤이 대신한다고 할까. 신용카드도 따져 보면 외상은 외상이니. ‘달아 놓으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가게주인이나 손님이 함께 무탈하게 웃었던 거래. 40대를 넘긴 중·노년층이라면 그 외상 장부를 가끔씩 떠올리지나 않을까.

1980년대 중반쯤만 해도 서울 도심의 광화문, 무교동에는 외상이 통하는 허름한 술집들이 몇몇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달아 놓고 먹는’ 술집들이었다고 했다. 술집이라야 맥주 막걸리에 파전 북어포 따위를 파는 집. 주인이 없어도 먹은 내역과 이름만 어딘가에 적어 놓고 가면 그만이었다. 일종의 외상 장부인 셈이다. 그런 집들에 주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밤을 꼬박 새우는 올빼미족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거의 잊혀진 채 몇몇 사람만 기억할 추억의 외상 술집 하나가 화제다. 1910년 이전부터 1978년까지 사직동에 있었던 명월옥이란 집. 외상 먹은 사람 300여명과 외상 내역을 촘촘히 적은 장부 3권을 서울역사박물관이 찾아냈다고 한다. 주인장의 머리숱이 적어 대머리집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는데. 신문기자며 문인, 공무원, 탤런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사들이 장부에 수두룩하단다.

지금이나 그때나 단골 외상은 여전한가 보다. 외상 장부에 1950년대 말부터 12년동안의 외상 내역이 깨알같이 적혔는데, 같은 이름이 숱하다고 하니. 따져 보면 외상손님 버선 발로 뛰어나가 반길 술집 주인이 어디 있을까. 인정 어린 외상 거래의 바탕은 분명 믿음이다. 40년 전쯤 우리 동네에 흔했던 외상 장부가 그랬듯이. 오늘 어디서 외상 장부를 하나 만들어 볼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2009-07-3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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