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논쟁이 뜨겁다. 삶이 그렇듯 죽음도 인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이미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을 기계적으로 연장시키는 무모한 시도, 이를테면 문명 만능주의에 대한 각성과 반동이 사회적 논란으로 다시 불붙은 형국이다. 그러나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환자의 권리를 ‘자살할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폄하한다. 기대치는 낮지만 엄존하는 의학적 소생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배제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미지 확대
심재억 전문기자
닫기이미지 확대 보기
심재억 전문기자
논의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연명치료에 의존하고 있는 김모(77) 할머니에 대해 대법원이 연명치료 중단을 선고하면서 표면화됐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병원이 사전의료지시서를 통해 말기암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혀 사실상 존엄사 수용 의사를 밝혔다. 대법원 판결 이후 세브란스병원도 자체 존엄사 기준을 제시하고 나섰으며, 국립 암센터도 윤영호 박사 주도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곧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되짚어 보면 우리 사회에서 존엄사 문제가 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1년 의료계 일각에서 존엄사 수용을 전제로 한 가이드라인 제정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그게 소극적 안락사 아니고 뭐냐?”는 주장에 밀려 이내 풀이 죽고 말았다.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는 엄연히 다른 개념임에도 한번 잘못 든 물길은 쉽사리 바로 잡히지 않았다. 그 전, 보라매병원 의료진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적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재개된 존엄사 논의는 보다 실천적이다.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선제적으로 이뤄지는 입법이 논의의 종결일 수는 없다. 입법에 앞서 모든 의료기관이 적용할 수 있는 통일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며,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관련 지침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 이런 선행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요원할 것이고, 이 경우 존엄사가 곧 안락사라거나 ‘합법적인 고려장’이라는 윤리적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의료진과 보호자가 합의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은 우리 의료 현장에서도 일상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이는 관행일 뿐이어서 언제든 제2, 제3의 보라매병원 사태를 낳을 개연성을 안고 있었다. 법적 근거없이 안락사를 자행했다는 범법의 위험을 감수하고 선뜻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낼 의사가 어딨으며, 또 죽음을 신성시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가족의 연명치료 중단을 누가 그리 쉽게 결정하겠는가? 연명치료 중단을 제도화하는 문제에 관해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환자 자신의 자율적 의지를 존중하는 것은 인륜에 부합하는 합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암 환자 한명이 한 살림 거덜내는 것은 일도 아닌’ 현실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연명치료 중단 문제가 현대판 고려장 논란으로 비화할 것이라는 예단은 여기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말기암 환자 때문에 나머지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는다면 누구나 고려장적 연명치료 중단의 유혹에 귀를 기울일 것임은 자명하다. 존엄사 관련 법안에 ‘고려장 방지를 위한 정책적 지원책’이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엄사 논의는 물꼬를 텄지만 여전히 사회적 논의는 미진하다. 특히 제도화에 발목이 잡혀 ‘죽음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와 합의를 소홀히 한다면 그 법조문이 또 하나의 사문(死文)에 불과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일련번호로 호명되는 수많은 환자 한명의 죽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늦었지만 ‘내 이름으로 죽을 권리’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2009-06-10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