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메일 한 통의 깨달음/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문화마당] 메일 한 통의 깨달음/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입력 2006-08-31 00:00
수정 2006-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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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가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어떤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디선가 그 사람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일까,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경미한 교통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정차해 있는데, 다른 차가 내 차를 추돌하였다. 내려서 보니 뒤 범퍼가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냥 수리만 받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추돌한 당자가 내리더니, 미안하다, 다치지는 않았느냐는 말은 하지 않고 재수가 없다는 투로 투덜거리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수리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당자가 수리비를 반만 부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은 심한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바로 그 당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매우 미안해하면서 사과를 했지만, 다시는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평소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는 의미이다.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일로 부딪칠 때가 있다. 평소 직장이나 학교에서 늘 접하며 동고동락을 같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길가에서 잠깐 옷깃을 스치는 경우처럼 가볍게 한 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경우이든 이 모든 것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귀중한 만남을 소홀히 함으로써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제자인 A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고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작년 여름,A가 상담을 받고 싶다 해서 상담 일자와 시간을 정해두고서는 바쁜 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다시 상담 일자를 정하려고 A의 휴대전화로 수차례 전화를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츰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메일이 온 것이다. 내용인 즉, 그때 무척 섭섭했노라고, 아버지가 퇴직을 해서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워 장학금 상담을 하려 했다는 것,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했고 2학기에 복학을 한다는 것, 복학하기 전에 선생님께 먼저 인사를 드린다는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스승으로서 나는 제자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을 한 것이었다.A의 메일을 읽고 난 뒤,A 아닌 학생에게도 그런 잘못을 한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았다. 부끄럽게도 매우 많이 제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후회가 엄습했다. 추돌사고를 내고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과 내가 다를 것이 하다도 없다는 뼈아픈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끝났을 수도 있는 만남을 다시 시작하게 해 준 제자로부터 정말 값비싼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방학 동안 다소간 조용하던 교정에도 다시 학생들로 활력이 넘쳐나고 있다. 개강 첫 시간에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어보면서 찬찬히 학생들의 얼굴을 보았다. 낯익은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모두가 눈빛이 맑고 영롱했다. 그 속에 A의 해맑은 얼굴도 있었다.A에게, 그리고 우리 학생들 모두에게 다시는 가슴 아픈 상처를 주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아마도 이번 학기는 내 교직 생활에서 무척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다. 그 끝자리에 가을이 시작되는 문턱이 있다. 계절은 그렇게 끝과 시작이 맞물리면서 우리들 곁에 다가온다. 다가올 가을, 또 다른 많은 만남이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 제자의 메일 한 통을 마음의 책갈피에 곱게 담아 두고 싶다.

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2006-08-3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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