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이 커서 혼인할 나이가 됐다. 엄마. 내가 아이 낳으면 엄마가 길러줄 거지? 심심하면 묻는다. 엄마는 소설 쓴다고 늘 혼자 바쁘고 저들은 꼭 일을 가져야 하는데 그럼 갓난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당연히 고민이 될 터이다. 앞으로 직장마다 탁아소가 생긴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아이를 맡기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이는 짐을 임시로 보관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그래서 요즘 할머니는 누군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조건으로는 아직 할머니가 아니지만 나이로는 할머니가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인데 왜 어느 지점에서부터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농경시대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 하나가 일꾼 하나이니 집집마다 자식이 재산이었다. 재산은 그제나 이제나 많을수록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 재산은 어디서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낳는 것이었다. 그럴 때 미인은 당연히 아이를 잘 낳는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재산을 불리다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때가 오는데 폐경기라고 한다. 폐경은 마흔 후반에서 쉰 중반에 오는 것이 보통이다. 폐경 때쯤엔 이미 며느리를 보아 집안에선 할머니가 되기 쉬웠다. 그 할머니는 누군가.
사람이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소용돌이의 가운데를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할머니라는 여자가 살아낸 생산의 소용돌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여자는 다만 아이를 낳기 위해 발정기라는 격정의 한 때를 산다. 격정은 몸과 맘을 들뜨게도 하고 깊이 가라앉히기도 하면서 상처와 행복을 경험하게 한다.
더군다나 가족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여자는 ‘시집’으로 들어가 낯설고 물선 곳에서 살아내야 했다. 시집살이라는 말은 처가살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산천을 떠나 사는 삶의, 갖은 어려움을 간직한 말들이다. 시집에 살던 처가에 살던 ‘들어가 사는’ 쪽이 적응해야 했다. 낯선 사람과 낯선 풍속과 낯선 산천에 적응한다는 건 요샛말로 ‘스트레스’다. 할머니는 그런 스트레스를 건너온 여자인 것이다. 여자마다 그걸 건너온 사정은 다르겠지만 대강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치러내는 ‘소용돌이’의 힘겨움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시대가 여성과 며느리와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살피고 이해하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사람은 그가 겪어낸 고생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할머니의 가치는 살아낸 세월이 모두 보석이게 한다. 할머니는 스트레스를 통해 생의 도(道)를 터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진 가시밭길과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사막 길과 험한 파도를 견디며 오로지 자식을 낳아 길러내게 한 것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 세월을 지나면서 득도(得道)의 경지에 닿도록 한 것이다.
할머니는 내면으로 생의 이치를 깨친 사람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깨친 도를 팔아먹지 않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지 않는다. 사랑은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힘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속(巫俗)의 신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다. 삼신할머니 산신할아버지가 그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오래된 조상들은 이렇게 생산의 와중을 살아낸 사람들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사람 중에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알아서 신(神)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죽어서도 산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키워야 하는 이유, 대가족 제도가 사람의 품성을 따뜻하게 한 이유, 핵가족으로 살게 된 요즘 사람들이 물질로는 풍요로워도 내면이 고독하고 공격적인 이유를 우리는 ‘오늘의 할머니’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경자 소설가
아이를 낳은 여자는 죽을 때까지 어머니인데 왜 어느 지점에서부터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농경시대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 하나가 일꾼 하나이니 집집마다 자식이 재산이었다. 재산은 그제나 이제나 많을수록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 재산은 어디서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낳는 것이었다. 그럴 때 미인은 당연히 아이를 잘 낳는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재산을 불리다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때가 오는데 폐경기라고 한다. 폐경은 마흔 후반에서 쉰 중반에 오는 것이 보통이다. 폐경 때쯤엔 이미 며느리를 보아 집안에선 할머니가 되기 쉬웠다. 그 할머니는 누군가.
사람이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소용돌이의 가운데를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할머니라는 여자가 살아낸 생산의 소용돌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여자는 다만 아이를 낳기 위해 발정기라는 격정의 한 때를 산다. 격정은 몸과 맘을 들뜨게도 하고 깊이 가라앉히기도 하면서 상처와 행복을 경험하게 한다.
더군다나 가족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여자는 ‘시집’으로 들어가 낯설고 물선 곳에서 살아내야 했다. 시집살이라는 말은 처가살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산천을 떠나 사는 삶의, 갖은 어려움을 간직한 말들이다. 시집에 살던 처가에 살던 ‘들어가 사는’ 쪽이 적응해야 했다. 낯선 사람과 낯선 풍속과 낯선 산천에 적응한다는 건 요샛말로 ‘스트레스’다. 할머니는 그런 스트레스를 건너온 여자인 것이다. 여자마다 그걸 건너온 사정은 다르겠지만 대강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치러내는 ‘소용돌이’의 힘겨움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시대가 여성과 며느리와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살피고 이해하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사람은 그가 겪어낸 고생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할머니의 가치는 살아낸 세월이 모두 보석이게 한다. 할머니는 스트레스를 통해 생의 도(道)를 터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진 가시밭길과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사막 길과 험한 파도를 견디며 오로지 자식을 낳아 길러내게 한 것은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 세월을 지나면서 득도(得道)의 경지에 닿도록 한 것이다.
할머니는 내면으로 생의 이치를 깨친 사람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깨친 도를 팔아먹지 않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지 않는다. 사랑은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힘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속(巫俗)의 신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다. 삼신할머니 산신할아버지가 그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오래된 조상들은 이렇게 생산의 와중을 살아낸 사람들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사람 중에 가장 지혜로운 존재로 알아서 신(神)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죽어서도 산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가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키워야 하는 이유, 대가족 제도가 사람의 품성을 따뜻하게 한 이유, 핵가족으로 살게 된 요즘 사람들이 물질로는 풍요로워도 내면이 고독하고 공격적인 이유를 우리는 ‘오늘의 할머니’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경자 소설가
2005-09-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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