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근처에 해발 300m가량 되는 산이 있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용이 살 만큼 산세가 험하지 않다. 작고 아담한 산이지만, 그런 산이 집 주위에 있다는 것에 늘 고마워한다. 틈만 나면 그 산에 올라 운동도 하고 복잡한 머리도 식히곤 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산을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부쩍 늘어나서 공휴일에는 앞사람 엉덩이를 보고 올라야 할 정도이다.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로 붐비면서 짜증나고 불쾌한 일들을 왕왕 겪는다. 산 입구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는, 애완견을 데리고 산에 오를 때는 반드시 배설물을 치우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이를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다. 한 줄로 서서 좌측통행을 해야 하는데도, 무리를 지은 채 뒤죽박죽 엉켜서 좁은 산길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기까지 한다. 심지어 키 작은 나무를 발로 짓밟는 이, 지팡이로 삼기 위해 큰 가지를 부러뜨리는 이, 담배를 버젓이 피우는 이, 술을 마시는 이도 있다.
정상에 올라 푸른 하늘을 마주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스리려 하면, 바로 옆에서 ‘야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달아 악을 쓴다. 그런 사람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물론, 힘들게 산에 오른 기쁨과 쾌감으로 ‘야호’라 외치는 것이 뭐 그리 나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산에서 ‘야호’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이고 정복자적인 논리로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런 위대한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며, 자연을 비롯한 그 외 모든 것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라는 생각은 근대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핵심사상이다.
그 사상이 도로와 철길을 만들고 골프장과 스키장과 콘도를 만들면서 우리에게 삶의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반면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인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보면 친일지주 윤직원 영감이 “나만 빼고 다 망해라.”라고 외치는 구절이 있다.‘나’만 중요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 논리에는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잠복해 있다.‘나’만 고귀하다는 오만한 생각은 ‘너’를 언제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을 수 있다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전무하다. 모두가 ‘나’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복종하고 희생해야 하는 하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가차없이 정복되어야 할 적일 뿐이다.
이제 곧 산과 들에 온갖 꽃들과 풀들과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생명의 싹을 틔우면서 대지를 온통 녹색향기로 물들일 것이다. 봄날, 홀로 적요한 산을 오르면서 숲 가득 넘쳐흐르는 생명의 숨결에 취해보자. 그러면,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편안히 맡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까지 반갑다고 손을 가볍게 흔들고 미소를 은근히 짓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복자로 자처하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한 반면, 오랜 세월 묵묵히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자연이 참으로 은혜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함께 세상을 조화롭게 가꾸어 나아갈 동반자이다. 자연 없이 인간만 있다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마찬가지로,‘나’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 가족과 같은 내 이웃이 있고, 또 자연이 있기에 내가 있는 법이다.‘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맙고도 소중한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점점 푸르러 가는 산처럼, 스치는 작은 인연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런 아름다운 빛깔로 우리들 마음을 가꿀 수는 없을까.
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그런데 사람들로 붐비면서 짜증나고 불쾌한 일들을 왕왕 겪는다. 산 입구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는, 애완견을 데리고 산에 오를 때는 반드시 배설물을 치우도록 권유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이를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다. 한 줄로 서서 좌측통행을 해야 하는데도, 무리를 지은 채 뒤죽박죽 엉켜서 좁은 산길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기까지 한다. 심지어 키 작은 나무를 발로 짓밟는 이, 지팡이로 삼기 위해 큰 가지를 부러뜨리는 이, 담배를 버젓이 피우는 이, 술을 마시는 이도 있다.
정상에 올라 푸른 하늘을 마주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스리려 하면, 바로 옆에서 ‘야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연달아 악을 쓴다. 그런 사람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물론, 힘들게 산에 오른 기쁨과 쾌감으로 ‘야호’라 외치는 것이 뭐 그리 나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산에서 ‘야호’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이고 정복자적인 논리로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고, 그런 위대한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며, 자연을 비롯한 그 외 모든 것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라는 생각은 근대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핵심사상이다.
그 사상이 도로와 철길을 만들고 골프장과 스키장과 콘도를 만들면서 우리에게 삶의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반면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인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채만식의 ‘태평천하’를 보면 친일지주 윤직원 영감이 “나만 빼고 다 망해라.”라고 외치는 구절이 있다.‘나’만 중요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 논리에는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잠복해 있다.‘나’만 고귀하다는 오만한 생각은 ‘너’를 언제든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짓밟을 수 있다는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전무하다. 모두가 ‘나’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복종하고 희생해야 하는 하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가차없이 정복되어야 할 적일 뿐이다.
이제 곧 산과 들에 온갖 꽃들과 풀들과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생명의 싹을 틔우면서 대지를 온통 녹색향기로 물들일 것이다. 봄날, 홀로 적요한 산을 오르면서 숲 가득 넘쳐흐르는 생명의 숨결에 취해보자. 그러면,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편안히 맡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 돌멩이 하나까지 반갑다고 손을 가볍게 흔들고 미소를 은근히 짓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복자로 자처하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한 반면, 오랜 세월 묵묵히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는 자연이 참으로 은혜로운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함께 세상을 조화롭게 가꾸어 나아갈 동반자이다. 자연 없이 인간만 있다면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마찬가지로,‘나’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 가족과 같은 내 이웃이 있고, 또 자연이 있기에 내가 있는 법이다.‘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다면, 모든 것이 고맙고도 소중한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 점점 푸르러 가는 산처럼, 스치는 작은 인연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런 아름다운 빛깔로 우리들 마음을 가꿀 수는 없을까.
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2005-03-2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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