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문화 다양성’이란 말의 비극성/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과 교수

[시론] ‘문화 다양성’이란 말의 비극성/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과 교수

입력 2005-03-11 00:00
수정 2005-03-1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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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대왕’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과거에 행한 비 인륜적 죄악을 찾아가는 행적을 그린 이 작품의 줄거리는 끔찍하기까지 하다. 마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보는 것과 같이 흥미로운 추리전개방식의 이 작품은 세계 연극사에서 가장 위대한 비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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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
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 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과 교수
얼마 전 ‘문화다양성 포럼’이라는 단체가 창립되었다. 문화가 다양해지기를 갈망하는,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문화가 동등하게 인정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소박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등장한 이 ‘문화다양성’ 이란 단어를 가만히 음미해 보면 무척 비극적인 사연을 지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화’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에 이미 백화제방과도 같은 다양성의 존재는 너무도 당연한 것 같은데 왜 구태여 ‘다양성’이란 단어를 사족처럼 붙였는가라는 의문이다. 작금에 이르러 문화라는 것이 그 당연한 본질성을 잃고 미아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다양성’이란 말이 씁쓰레한 비극적 모습으로 비추어진다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즉 문화 패권주의, 문화 획일주의, 배타적 문화, 일방적 문화 등과 같은 언어들의 경우 말이다.20세기 중엽 이후에 ‘문화’라는 유쾌한 단어 앞뒤에 위와 같은 흉측한 수식어들이 붙기 시작했다. 물론 문화가 20세기의 격동적인 정치, 사회, 경제의 부침 속에서 큰 시련을 받아온 결과일 것이다. 전쟁일보 직전의 음모적인 수사와도 같은 이러한 명칭들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도 국가 간에, 민족 간에 엄연하게 그 구체적 증거들을 감추지 않고 있다.

거대한 물량을 앞세워 시장을 계속 지배하고자 하는 미국영화, 동양문화에 대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서양문화의 우월감, 품격 있어 보이려 하는 모든 광고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서양예복과 클래식음악, 그리고 TV드라마의 클라이막스 때마다 꼭 등장해야 하는 서양음악, 점점 더 인기를 끄는 미국 뮤지컬, 오랜 세월 동안 작위적으로 형성된 주류문화에 의해 박대 받는 비주류문화, 불행한 사회구조를 그대로 본떠서 형성된 문화계의 수직구조, 오랫동안 문화 예술인들의 의식을 점유했던 순수와 상업이라는 기이한 이분법, 이런 식으로 언변을 전개하면 촌스러운 국수주의자로 명명되지나 않을까 스스로 행하는 어설픈 자기검열의 노이로제 등등…

문화다양성이란 합성어가 내포하고 있는 궁극적인 비극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답은 아주 쉽다. 그것은 바로 세계 속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종 간에, 민족 간에, 국가 간에, 사람 하나하나 간에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평등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이다. 그러한 평등의 권리는 누구에게 지배받거나 속박받을 이유가 없다. 또한 그러한 평등한 권리에서 나온 모든 자연스러운 표현, 즉 문화 또한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다양성을 위한 운동은 자연회귀의 한 방식일 수 있다. 원래 문화, 즉 삶의 방식과 표현이라는 것은 인간의 수효만큼 다양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알기 위해 생각을 짜낸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렇게 머리를 써서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 파멸한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지에 대한 욕구, 즉 문명에 의한 맹목적 역사진행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문명이 그의 사촌인 문화의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유토피아로 진행되어야 할 역사가 도리어 역행하는 현상은 결국 문명을 만들어낸 인간밖에는 막을 도리가 없다.

채승훈 서울연극협회 회장·수원대 연극영화과 교수
2005-03-11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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