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영화 ‘알렉산더’를 보고/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래전략연구원장

[열린세상] 영화 ‘알렉산더’를 보고/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래전략연구원장

입력 2005-01-10 00:00
수정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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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마케도니아 정복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알렉산더’가 현재 한국에서 상영되고 있다. 새해 연휴 기간에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세계사 교육을 아직 안 받은 딸이 “우와 그 잔인한, 야만적인 사람이 뭐가 좋다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지.”라고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알렉산더의 본 모습을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입된 지식, 그리고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는 만큼 무지해지는 아이러니를 갖게 된다.

선입견 없이 보면 너무나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본질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는 것의 아이러니’는 많은 경우 의도적으로 이용된다. 역사 서술의 경우 이러한 사가들의 의도가 많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했다는 서술이나,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했다고 알게 되면, 그 이전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며, 한국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알게 되면 무례한 한국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아메리카 원주민도 존재하고, 무례한 한국 사람도 존재한다. 이러한 ‘아는 것의 아이러니’가 생겨나면 ‘알면서 모르는’ 사람은 지식을 조작하는 세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어 조작 세력은 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통한 영향력을 ‘소프트 파워(soft power)’ 혹은 ‘연성권력’이라고 부른다.

영화 ‘알렉산더’는 독특한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다.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삐딱한 영화를 많이 만들기로 유명한 올리버 스톤이 감독한 영화여서 그런지 이 영화는 서구 문명의 근원인 그리스·로마 문명을 무조건적으로 미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페르시아인과 동방인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 그리스인들을 보여 주면서 이들의 문명관을 조롱하고, 알렉산더의 광기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불완전한 정복자를 묘사한다. 또한 아무런 의미 없는 동방으로의 끝없는 정복이 무고한 생명만을 앗아가는 전쟁으로 귀결된다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와 동방의 장엄한 건축과 문명을 보여주면서 타 문명에 대한 존경심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올리버 스톤은 ‘야만적인’ 중동에 민주주의를 심기 위해 들어간 미국을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비유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미국제국의 건설계획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대표되는 서양 문명을 다시 한번 동방인인 우리에게 전파하고 교육하고 있다. 이미 우리들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수차례 미화된 그리스·로마 문명이 더욱 아름답게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배경으로 깔리고 있고, 신화적인 고대사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해 알렉산더의 제국을 그야말로 문명국가 건설에 버금가는 위대한 작업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잔인하고 잔혹한 알렉산더도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으로 남기고자 한다.

영화 ‘알렉산더’의 소프트 파워는 이러한 서양문명의 뿌리에까지 동방인이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안에서 모르는 만큼 보이게 해 주는 계몽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쩌면 고대의 알렉산더가 칼과 창의 힘으로 동방을 정복해 나갔다면, 지금의 알렉산더는 생각을 지배하는 소프트 파워로 동방을 정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소위 동방의 우리는 칭기즈칸의 기마병을 대체할 만한 21세기 동방의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 서양의 저들은 동방의 문명과 얼마나 친숙하며, 동방의 위대한 영웅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저들은 우리의 광개토대왕과 이순신의 위대함을 알고 있는가? 영화관을 나오면서 괜히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미래전략연구원장
2005-01-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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