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머니의 처녀 적/조태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머니의 처녀 적/조태일

입력 2020-06-25 17:32
수정 2020-06-26 02:49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어머니의 처녀 적/조태일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누에가 걸쳤던 새하얀 비단실 뽑아 올리면
펄펄 끓는 물 위에
기름 번지르르한 노오란 번데기가
다투어 둥둥 떠올랐다

해는 왜 그리 길고
배는 왜 그리 고픈가
현장 감독의 눈을 피해 졸고
졸면서 번데기로 배를 채웠다

힘없어 애 못 낳는 여자
한 말만 먹으면 애를 낳고 만다는
그 번데기 때문인지

열일곱에 서른다섯 노총각 스님에게
업혀 와서 칠 남매 낳으신 뒤에도
어머님은 생사 공장의 여공이었다
6ㆍ25가 끝난 한참 후에까지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2%가 부족해 어머니를 만들었다 하지요. 어머니는 내 생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해였으니 생일을 기억할 정신 어디 있었겠는지요. 추석이 지나고 첫서리 내린 날 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뒤. 어머니가 기억한 내 생일입니다. 저녁 밥숟가락 놓은 뒤, 라는 말에 나는 안도의 숨을 쉽니다. 다행이야, 밥을 굶지는 않았으니. 황숙기가 끝나고 무논에 모심기하던 사람들이 개밥바라기 별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유월, 어머니는 별이 되었습니다.

곽재구 시인
2020-06-26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탈모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1. 건강보험 적용이 돼야한다.
2. 건강보험 적용을 해선 안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