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미물인들 제 목숨 귀함을 알거늘, 내 오늘 패전에서 조 승상께 입은 은혜 어찌 가벼이 잊으리까.” / “고맙구려. 이 못믿을 세상. 간만에 의리에 닿는 말 들었소.”
조조과 관우가 차분한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도 연출의 손짓은 쉬질 않는다. 공명이 남병산에 올라 비나리를 하자 자진모리의 빠른 음악이 흐르며 애크러배틱과 무예가 뒤섞인 현란한 군무가 펼쳐진다. 적벽대전에 앞서 군사들이 신세 한탄을 하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배역에 제대로 몰입하며 흐느끼면서도 익살을 부려 웃음바다를 만든다.
지난 20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의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 미리 만난 ‘적벽’은 기존 창극과 다른 모습이었다. 소리에도 정가와 시조를 섞고 다양한 움직임을 넣어, 연습일 뿐인데도 역동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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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국립창극단 ‘적벽’의 한 장면. 왼쪽부터 관우 역의 왕기철, 유비 역의 김학용, 장비 역의 윤석안이 도원결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② 적벽’의 연출을 맡은 이윤택(맨 오른쪽)과 연습 중인 배우들 국립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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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국립창극단 ‘적벽’의 한 장면. 왼쪽부터 관우 역의 왕기철, 유비 역의 김학용, 장비 역의 윤석안이 도원결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② 적벽’의 연출을 맡은 이윤택(맨 오른쪽)과 연습 중인 배우들 국립극장 제공
●민중의 소리·해학도 담아내
이 작품은 ‘우리시대의 창극’ 시리즈의 네번째 작품으로, 판소리 다섯바탕 중 가장 호방하고 힘찬 ‘적벽가’를 기반으로 했다. 판소리 중 유일하게 민간설화가 아닌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을 차용한 ‘적벽가’를 창극으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일단 작품의 핵심은 비장함이 묻어나는 공연 포스터에 나타난다. 칼을 들이댄 이와 그 칼 끝에 목이 닿은 이, 바로 관우와 조조이다. 여기서 조조는 흔히 알고 있는 ‘조조 같은 놈’의 간신이 아닌, 한때는 영웅이었고 결국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런 조조와 대결구도에 있는 관우는 넉넉하고 충성스러운 덕을 갖춘 장수로 비춰진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인간관계 외에 민중의 소리와 해학도 담았다. 군사들이 신세 한탄을 하는 대목, 가족과 이별하는 장면 등에서 이름없는 군사의 노래를 통해 민중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다양한 전통예술과 조명, 무대, 무술 등을 조화시켜 장대한 규모의 호방한 드라마로 만들었다.”면서 “하이라이트는 역시 불타는 적벽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10m가 넘는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을 연출하고, 5척의 배가 무대를 누빈다. 불길을 표현하기 위해 붉은 조명으로 무대를 불타오르게 해 역동적이고 화려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판소리 사설 훼손 하지않고 변화 꾀해
‘적벽’의 연출은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 연출가인 이윤택이 맡았다. 연습을 끝내고 만난 그는 ‘적벽’에 대해 “종합예술로서 다양한 조건을 갖춘 음악극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적벽’은 판소리의 사설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변화를 꾀했다. 소곡들을 웅장하거나 우아하게 편곡하고, 강렬한 장단을 주며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했다.
“연출가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리 체계를 그대로 갖고 있는 판소리를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그런 실험의 하나입니다. 어떤 장르가 될지는 공연을 해봐야 알 수 있지만 토종 뮤지컬, 한국형 오페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늘 같습니다.”
그는 또 “창극이나 판소리를 볼 때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람이 많은데 ‘적벽’은 대사의 90% 정도가 들리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출연하고, 공명과 방통 등 책사 역을 여성이 맡는다.”면서 “폭넓은 배우들이 창극에 출연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이라고 강조했다.
‘적벽’은 29일부터 새달 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02)2280-4115~6.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2009-10-2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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