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서 온 치과 손님

먼 데서 온 치과 손님

입력 2006-12-15 00:00
수정 2006-12-1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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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개그맨이 되었을 당시엔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 방송국 가는 날이 아니면 틈틈이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기도의 모 치과에서 진료를 하던 어느 날,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외국인 한 사람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들어왔다.

자신을 파키스탄에서 온 근로자라고 소개한 그는 일하다 실수로 넘어져 앞니가 깨졌다며 당장 안 아프게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칼퇴근은 아르바이트의 철칙이지 않은가? 나는 당장 퇴근하고 싶어 하는 직원과 어떻게든 치료를 해줬으면 하는 외국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직원에게 살짝 윙크하고 진료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너무 아프다고 하여 우선 신경치료를 해주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앞니가 깨진 환자들은 대부분 넘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 구타나 폭행으로 깨진 경우가 많다. 이 환자도 고용주인 한국 사람한테 맞은 듯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하소연할 데도 없이 어떻게든 안 아프게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건강보험증도 없었지만 치료비는 보험 진료했을 때와 같은 비용만 받았다. 마지막 진료 때에는 이를 씌워야 하기 때문에 진료비가 비싼데, 돈이 없다고 해서 치아색으로 티 안 나게 때워주었다. 나중에 돈 벌면 예쁘게 씌우라고 하고 치료비 대신 특별한 제안을 했다. ‘좋은 한국 사람이 훨씬 많다’고 열 번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치료비였지만 그는 내 제의에 흔쾌히 응하며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며칠 뒤 치과를 그만두는 날, 그가 불쑥 찾아왔다. 자신은 김치공장에서 일하는데, 나한테 선물하기 위해 잘 익은 김치를 가져왔다고 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까만 피부의 외국인에게 김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내 생애의 큰 이벤트 같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우리를 대신해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지금이라도 연락되면 앞니를 더 예쁘게 씌워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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