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의 영화, 99가지 모놀로그] 사랑도 이별도 기술이 필요하다

[김형기의 영화, 99가지 모놀로그] 사랑도 이별도 기술이 필요하다

입력 2006-11-16 00:00
수정 2006-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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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려고 애써도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사랑에 대한 기술의 미숙성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을 상실한 것은 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사회관계와 대인 관계의 빈틈없는 조직화 때문이며,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사랑은 원래 환상이고 허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무의식층에까지 파고들어가 인간의 내면세계를 분석해 보이면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인간 스스로 참된 자아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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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을로’
영화 ‘가을로’
세계적인 석학의 오랜 지론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으나 전적으로 이 이론에 동감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랑의 기술학적 의미와 필요성은 오랜 시간 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사랑과 불가항력적 필연관계에 있는 이별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게 사실이다.

그 기술적 사례가 여기 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2000년)에서 롭은 챔피언십 비닐이란 이름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음악광이다.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은 틈만 나면 각종 톱5차트를 만들어 내는데 이번엔 이별에 관한 노래 차트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롭이 오랫동안 사귀어 온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 지금까지 번번이 채이기만 했다고 생각한 롭은 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일일이 찾아가 자신과 헤어진 이유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상받기 위해 실시한 일상의 모험 끝에서 그는 깨닫는다. 상처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이별의 끝에 그들 모두 힘들어했고, 또는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은 함께 해놓고 이별은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니, 이런∼.

‘가을로’(2006년)에서는 더욱 가슴 절절한 이별을 이야기한다. 결혼을 앞둔 현우는 민주가 기다리고 있는 백화점으로 서둘러 향한다. 그러나 도착한 순간, 백화점이 처절한 굉음과 함께 그의 눈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십년 후, 지금. 누구보다 소중했던 민주를 잃어버린 지울 수 없는 아픔.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 자신이라는 자책감으로 현우는 지난 십년을 보냈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그는, 그 웃음을 잃어버린 차갑고 냉정한 검사가 되어버렸다.

여론과 압력에 밀려 휴직처분을 받고 상실감에 젖어 있던 현우에게 한 권의 다이어리가 배달된다.‘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란 글이 쓰여 있는 다이어리. 민주가 죽기 전 현우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현우는 민주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 다이어리의 지도를 따라, 가을로, 여행을 떠나는데….

사랑이 영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하지 못하여 우리는 늘 그립고 아쉬우며 외롭고 허전하다. 그래서 다른 사랑이 가능한 것이며 그 전에 이별의 수순을 거치기 마련이다.

롭이 이별의 아픔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현우가 이별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사랑이 어디 가능했을까. 시행착오를 줄이고 영원함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듯, 마찬가지 이유로 이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별은 사랑의 또 다른 시작이며 가능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시나리오 작가
2006-11-1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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