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잠깐 다녀왔다. 서울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 태평양을 넘지만 나는 대서양을 넘어 미국을 방문한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낀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처럼 북미의 큰 나라들도 있지만 파나마처럼 두 대양을 운하로 연결시키는 중미의 작은 나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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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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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땅과 바다가 지니는 지리적 의미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많은 저서들 가운데 독일의 공법학자 칼 슈미트(1888∼1985)의 ‘땅과 바다’(Land und Meer)가 있다. 이 책에서 슈미트는 역사는 ‘땅을 밟는 자’와 ‘바다를 가르며 항해하는 자’사이의 투쟁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투쟁은 가장 대표적인, 그리고 동시에 극히 매혹적인 역사의 장이라고 적고 있다. 또 땅과 바다의 이원론은 유럽근세의 정치와 국가, 법과 노동을 규정했다고 보는 그는 교통과 통신수단의 비약적 발달로 인해 땅과 바다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또 ‘땅의 법칙’(Der Nomos der Erde)이라는 다른 저서 속에서 그는 미국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이기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강국들이 형성하는 다수(多數)적 관계로서 새로운 ‘땅의 법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그러나 평화협정이나 국제기구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과 같은 갈등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세계화라는 과정 속에서 민족국가가 그의 주권행사에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고 있는 조건하에서 땅과 바다의 의미도 사실 많이 변했다. 민족국가가 땅과 바다의 경계가 만들어 내는 절대공간을 그의 개념구성의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세계화시대의 땅과 바다는 ‘흐르는 공간’에 남아 있는 과거 삶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라 사이를 가르는 국경선 대신에 흡사 지평선이나 수평선처럼 다가가면 또다시 멀어지는 경계선이 아닌 경계선이 ‘세계사회’를 그물처럼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공산당 선언’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저서 ‘제국’(Empire)도 과거 땅과 바다의 장악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는 달리 중심이 없는, 따라서 안과 밖도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그물과 같은 세계로서 오늘의 제국(帝國)을 보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정치적 실체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땅과 바다의 의미가 세계화와 더불어 날로 변화하고 있다지만, 가령 세계화에 저항하는 비정부기구적인 성격을 띤 수많은 지역적 저항과 운동들은-그것이 설사 정치적 낭만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손 치더라도-땅과 바다의 새로운 의미를 다시 생각케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대륙의 한 모서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광대한 태평양의 줄기와도 닿아 있는 한반도에 있어서 오늘날 땅과 바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륙세력 중국과 해양세력 일본 사이에서 오랫동안 시달렸던 한반도는 유형무형의 상품흐름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화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가령 ‘동북공정’이나 독도분쟁이 보여 주고 있듯이-그것이 지금까지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땅과 바다의 의미를 쉽사리 버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의미나 비중이 앞으로 커질 수도 있는 여러 증후(症候)까지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자주 이야기되는 ‘동북아의 허브’가 단순한 소망사항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남북을 다시 잇는 철도와 도로는 최우선적 과제다. 그렇게 될 때 한반도는 비록 작지만 태평양과 대서양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대륙의 역할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한 한반도는 태평양 자락에 있는 부산과 대서양가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연결하는 ‘흐르는 공간’으로서 세계화시대에 걸맞은 땅과 바다의 새로운 의미까지도 전달할 수 있다.‘6·15공동선언’은 그러한 긴 이정표의 귀중한 시작이다. 이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우리는 결코 근시안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2006-06-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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