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육조소’에 나오는 불교에 대한 퇴계의 태도는 확고부동하다. 불교는 노자와 장자보다, 심지어 관중과 상앙이 부르짖었던 법가(法家)보다도 더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못박은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대감정은 물론 선왕 명종대에 있었던 문정황후와 보우스님과의 유착관계에 따른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비록 선왕(명종)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릴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사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아직도 그 후유증이 광범위하게 남아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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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퇴계는 불교를 이처럼 동방의 가장 심한 폐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일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퇴계도 한때 짧은 기간이었으나 선사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선 공부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47세.
퇴계가 머물렀던 암자는 월란암(月瀾菴)이라고 불리던 작은 선찰이었다.
퇴계는 이 암자에서 주자가 쓴 ‘심경(心經)’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의 심정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 같이 공경하였다.”
퇴계는 노년에도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엄격하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한번씩 읽었다고 하니, 작은 암자에서 깨달았던 ‘심경’의 영향은 실로 퇴계의 전생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월란암의 암자에 은거하였던 것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던 은퇴시기 직전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월란암은 퇴계에 있어 적멸궁(寂滅宮)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째서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한 결심을 불교의 선림(禪林)에서 하였음일까. 율곡처럼 비록 1년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퇴계는 어째서 불교가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선사 속에서 주자를 스승으로 삼기 위한 초발심을 단행하였던 것일까.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다.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더니
서림사 벽에 붙였던 그 시가 감개 깊어라.
천 년 뒤 우리나라 도가 없어 적막하니
여산 비추던 그 달빛 나의 침실 비춰다오(從師學道寓禪林 壁上題詩感慨深 寂寞海東千載後 自燐山月映孤衾).”
2006-02-15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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