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의 만화경] 친구라면…

[이현세의 만화경] 친구라면…

입력 2005-04-20 00:00
수정 2005-04-2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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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서 경주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바다는 내게 생명을 주었고 천년고도는 나를 성장시켰다. 그래서인지 나는 바다와 태양, 갈매기와 산새·물새들이 하얗게 나는 바닷가 절벽과, 고목에 어우러진 고풍 어린 담장을 그리는 걸 즐기고 깡마른 벌거숭이 아이들이 산과 바다를 뛰어다니는 원시적인 풍경을 즐겨 그린다. 물론 그 벌거숭이 속에 내 모습이 있고 내 어린 시절이 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은 도시의 삭막한 삶에 지친 내게 언제나 힘과 용기를 준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는 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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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주의 월성 초등학교를 나왔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에 그 친구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같은 학교를 다녔으며 다같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기성회비를 못내 학교에서 집으로 쫓겨올 때도, 피차 집에 가봐야 주머니 빈 할머니들뿐이어서 경주의 서천과 수도산에서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면 학교로 터덜터덜 돌아가던 것도 그 친구와 나였다. 사춘기가 되어 경주 남산에 텐트 하나 달랑 메고 주말마다 등산 가 야영하며, 괜히 억한 심정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 것도 그 친구하고 나하고였다.

세월이 흘러 그 친구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싫어 경주에 가 자리잡았고 나는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떨어져 지낼 수 있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없어지고 전화도 귀한 시절에 피차 생업에 전념하다 보니, 가끔 고향에 내려가서 보는 것 외에는 친구를 생각하는 시간도 없어졌다. 대신 사람이 그리우면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것 같은 동료작가들과 소주·막걸리를 물 마시듯 퍼부으며 설익은 사상논쟁이나 작품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살았다.

그러나 청명·한식이나 추석이 되어 성묘를 갈 때면 그 친구는 낫과 차례음식을 준비해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성묘를 간다. 둘이 만나 의논하는 것이라고는 울진과 경주에 흩어져 있는 산소를 어디서부터 벌초해 갈 것인가일 뿐이다.

뒤돌아보면 우리 둘의 이 여정은 30년이 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친구가 같이 가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 친구 없이 그 많은 산소를 혼자서 벌초한다는 것이 자신 없는 일이어서 항상 그 친구의 일정을 알아 보고 벌초를 가는 나였고, 그 친구 역시 자기 일정을 핑계삼아 날짜조정을 하는 적이 없어서 내가 내려가는 날이 곧 벌초하는 날이었다.

그 긴 세월을 변함 없이 함께해주는 친구는 한번도 생색낸 적이 없고 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 본 적이 없다. 기껏 나누는 얘기라고는 집에 별 일 없느냐는 말 한마디가 고작이지만 우리가 떨어져 지냈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가끔 그 친구가 가난하고도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메뚜기나 도루묵, 또는 멸치젓에 절인 콩잎 따위의 먹을거리를 철이 되면 별미라고 보내온다. 이럴 때면 비로소 떨어져 산다는 걸 실감한다.

그 친구는 마치 내게 공기와 같다. 그러나 내가 그 친구에게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경주에 가면 그 친구와 24시간을 함께 지낸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친구와 함께하고 가능하면 따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따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친구의 시간을 나누어 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언젠가 술을 마시다가 그 친구 생각을 했다. 그 친구를 나는 일년에 고작 두세번 만난다.10년이면 30번,20년이면 60번….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앞으로 100번 정도 만나면 우리는 북망산으로 간다. 세월은 얼마나 부족하고 친구와의 시간은 또 얼마나 보잘것없고,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망한가. 내겐 이런 친구가 하나 있다. 나보다 1년은 더 살아야 된다는 친구. 내 무덤에 잔디가 뿌리 내리는 걸 보고 죽어야 한다는 친구가 내겐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나면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우리와 같은 월성 초등학교 여자친구. 그 여자친구는 갈치 전문식당을 한다. 경주에 갔다가 들르지 않으면 너무 서운해 하는 여자친구. 이번 청명·한식에 들렀다가 어릴 때 먹던 도루묵 요리를 덤으로 내놓기에 맛있게 먹었더니 냉장고에 있는 도루묵을 몽땅 싸서 양은냄비 두개와 함께 주었다. 도루묵은 양은 냄비에 요리해야 맛있다는 말과 함께.

<만화가>
2005-04-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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