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29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7)-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입력 2005-03-04 00:00
수정 2005-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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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무덤은 비록 쑥대밭 숲에 파묻혀 있기는 했지만 봉분의 규모가 제법 커서 그 형태가 아직도 뚜렷하였다.

나는 무덤 앞에 서서 측은한 감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살아서는 기생인 까닭에 인간 이하의 천대를 받아왔던 두향. 그러면서도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깨끗하게 지켜나가면서 난초와 매화를 사랑했던 두향. 그러기에 퇴계와 같이 청아하고 진실했던 학자만을 사모했던 두향. 퇴계를 일편단심으로 사모하면서도 메아리 없는 사랑으로 종신수절한 두향. 그 두향이 지금 이곳에 사백여년간이나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에 사무치는 비장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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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기생의 몸이면서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 사람의 남성을 위해 한평생을 한 포기의 난초처럼 고요와 침묵으로 보내다가 깨끗하게 죽어간 두향. 그녀의 무덤은 지금도 남한강변 강선대 옆 쑥대밭 속에 누워 있다.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으니 벌초를 해 줄 사람도 있을 리가 없어서 봉분 위에까지 쑥대가 한 길이 넘도록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생전에 정성스럽게 가꿔 오던 난초와 매화는 무주공방(無主空房)에서도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듯이 그녀의 육신은 이미 썩어 진토가 되었어도 그녀의 이름만은 아직도 끊임없는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산(鷺山)도 단양을 지나면서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지 않았던가.

“내 비록 풍류랑(風流郞)은 아닐지언정 두향의 무덤 앞에 꽃 한 송이 못 놓고 가는 것이 어떻게나 서운한지 모르겠다.”

작가 정비석이 인용하였던 노산의 기행문은 바로 ‘가고파’와 ‘성불사의 밤’으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은상(李殷相)을 가리키는 것. 어쨌든 정비석의 이런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두향의 무덤은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정비석은 두향의 무덤 앞에 표석(表石)을 세워준 최초의 제주(祭主)였다. 이때의 심경을 정비석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무려나 두향의 무덤은 쑥대밭 속에 파묻혀서 머지않아 망실되어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영고성쇠는 우주운행의 섭리이고 보니 두향의 무덤인들 어찌 망실의 운명을 면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퇴계학이 날로 빛을 더해가고 있는 이때에 비록 그늘의 여인이었다고 해서 두향의 무덤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두향의 무덤을 바라보며 창연감(然感)을 금할 길이 없어 봉분 위에 표석이나마 하나 세워주도록 촌민에게 몇 푼의 돈을 주어 신신당부하고 귀가길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문득 원로작가 정비석의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펜이 과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글을 쓰는 내 마음속에 항상 자리잡은 화두이지만 이처럼 휴머니즘의 작가정신은 사라져 가는 역사를 복원하고 잊혀진 인물을 되살리고 있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명기 두향의 무덤이 유실되지 아니하고 이처럼 보존되고 있음은 정비석만의 공이 아니다.

한일합병 전까지는 퇴계의 제자였던 이산해(李山海)의 가문에서 대대로 제사를 지내옴으로써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산해는 임진왜란 때의 영의정을 지낸 명신인데 그와 두향과의 인연은 이산해의 아버지였던 이지번(李之蕃)에서부터 비롯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03-04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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