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남궁경숙(南宮敬叔)과 주(周)나라로 여행을 떠난다.제나라로 망명하여 1년 남짓 외유하였던 것이 첫 번째 출국이라면 그 후 다시 9년 만에 해외로 출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출국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망명하였던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이때 공자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들어 46세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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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노나라의 주군이었던 소공은 7년 동안이나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객사하였으며,그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왕위에 올랐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오히려 계씨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서 내란이 일어날 만큼 노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어쨌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한지 4년이 된 정공 4년.공자는 수레를 타고 평소에 천하의 종주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주나라를 향해 두 번째의 출국을 단행한다.
이때 공자를 도와 함께 떠난 사람은 남궁경숙이었는데,그는 공자의 초기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그러나 남궁경숙은 공자에게서 예를 배운 제자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마천이 쓴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사마천은 공자의 70인 제자들을 낱낱이 기록하여 별항을 만들어 공자의 제자열전을 기록하고,그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 태사공은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학자들이 흔히 공문(孔門)의 70인 제자들을 저울질하여 칭찬하는 가운데에는 실제 이상으로 기리는 적도 있고,역시 실제 이하로 비방하기도 한다.어느 쪽도 모두 제자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다.제자들의 명부는 공씨의 벽 가운데에서 나온 고문(古文)에 의한 것이니 거의 정확할 것이다.나는 공자 제자들의 이름과 대화를 모두 ‘논어’에 실린 제자들의 문답에서 뽑아 차례대로 엮었으며,의심나는 것은 여기에 싣지 않았다.”
사마천의 말대로 남궁경숙은 공자의 제자임에도 공자의 집에서 전해오는 고문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논어’에 나오는 70여명의 제자 중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46세 되던 해,다른 제자는 모두 제쳐놓고 주나라로 남궁경숙과 함께 두 번째의 출국을 단행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공자와 남궁경숙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특별한 인연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따로 기록하고 있는데,그 내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렵 노나라에는 국보적인 유물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그것은 솥(鼎)이었다.고대중국에서 세 발로 만든 청동 솥은 원래 천자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그 후로 청동 솥은 제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신성한 제물로 여겨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솥은 구정(九鼎)이라 하여 고대 순임금 때 주조되어 이를 가진 나라는 정통적으로 천자가 계승하고 있다는 상징물로 신성시되어 왔던 것이다.따라서 하(夏),은(殷), 전국시대의 종주국인 주(周)왕조 대대로 이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는데,노나라에 있는 솥은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아니라 정고보(正考父)란 재상의 명문을 새긴 솥이었던 것이다.정고보는 송나라의 제10대 대공(戴公)에서 시작하여,11대 무공(武公),12대 선공(宣公) 등 3대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현인이었는데,이 청동 솥에는 정고보의 명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임명을 받고는 윗몸을 굽히고,두 번째 임명을 받고는 허리를 굽히고,세 번째 임명을 받고는 엎드리다시피 하여,담을 의지하여 길을 다니지만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아니한다.여기에 범벅이라도 좋고 죽을 쑤어도 좋다.내 입에는 풀칠만 하면 그만이다.”
2004-08-0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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