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포럼] 119조원의 딜레마

[대한포럼] 119조원의 딜레마

염주영 기자 기자
입력 2003-11-18 00:00
수정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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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막 끝난 요즘 농촌에는 일가족 야반도주가 속출하고 있다.지난봄 영농자금을 받아 피땀 흘려 농사를 지었건만 추수를 해놓고 보니 인건비는커녕 빚 갚을 길조차 막막해서다.추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빚독촉에 나선 농협이 야속하기만 하다.농협에 따르면 빚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밤 봇짐을 싸는 농가들이 단위조합별로 5∼10곳은 족히 될 것이라고 한다.

전국의 350만 농민들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다.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지난 1998년 이후 정부는 모두 6번의 농가부채 대책을 내놓았다.하지만 농가부채는 갈수록 늘고 있고,지난 2월 들어선 노무현 정부도 또 다른 부채 대책을 준비중이다.그러나 이번 조치로 빚을 털고 자립경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농민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그래서 성난 농민들이 19일 서울 여의도에서 대규모 농민시위에 나선다고 한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정부는 지난주 허겁지겁 초대형 ‘농정 로드맵’을 발표했다.향후 10년간 각종 농업 투융자 사업에 119조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이다.그동안 허송세월하다가 도하개발 어젠다(DDA)협상과 쌀 재협상으로 개방이 눈앞에 닥쳐서야 농민 달래기에 나서는 모습이 10년 전의 우루과이 라운드(UR)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그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우려된다.정부는 지난 10년간 농업에 무려 62조원을 쏟아부었다.그런데도 왜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지고,농민들은 빚에 억눌려 있어야 하는가?

정부는 농민 달래기에 급급한 나머지 119조원짜리 돈 보따리를 내놓기에 앞서 지난 10년의 농정 실패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해야 한다.그 실패의 원인은 아무리 농업 투자를 늘려도 농업의 생산성은 늘지만 농가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구조에 있다.수요 감소와 개방의 확대로 그냥 둬도 농산물 값이 하락할 판에 과잉생산을 유발해 가격폭락을 자초하기 때문이다.쌀이나 축산이나 유리온실 사업 등이 모두 증산일변도의 정책을 강행하다 실패한 예다.

필자는 한국농업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즉,관념적 농업보호론과 쌀 자급론만으로 잘사는 농촌,빚없는 농촌을 만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350만 농가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농업은 너무도 작은 밥그릇이다.전체 인구중 농가인구는 7.5%인데 전체 소득중 농업소득은 4%도 안 된다.게다가 더 큰 문제는 한정된 시장으로 인해 농업투자를 늘려도 소득은 못 늘리고 부채만 키우는 결과를 낳고 있는 데 있다.

농촌에 투자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농가의 밥그릇을 키우려면 농업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일본 농가들은 전체 소득중 쌀에서 얻는 소득의 비율이 3%에 불과한데 우리는 이 비율이 33%나 된다.또 일본 농가들은 농외소득 비율이 87%나 되는데 우리는 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개방화 시대의 농정은 ‘농업 살리기냐,농민 살리기냐’의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농민의 살 길은 농외소득을 확대해 탈농재촌(脫農在村)을 유도하는 정책에서 찾아야 한다.그러려면 농정의 기본 방향을 농업에서 농촌·농민으로 전환해야 한다.산업 중심에서 지역·사람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이를 위해 농림부의 이름을 ‘농업농촌부’로 바꾸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더 욕심을 낸다면 유럽 국가들처럼 ‘농업농촌식품부’로 확대 개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가 다시 119조원의 돈 보따리를 농민들에게 내밀고 있다.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빚쟁이를 만들어낼지 걱정이 앞선다.농민들에게 농가부채주의보를 울리고 싶다.

염 주 영 논설위원 yeomjs@
2003-11-18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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