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노동자와 시민권

[열린세상] 노동자와 시민권

김상봉 기자 기자
입력 2003-10-25 00:00
수정 2003-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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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대학생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을 일이 있다.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2300여 년 전에 씌어진 책이 이토록 현대적인지 새삼 놀라곤 한다.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시민의 자격을 논하면서 최선의 국가에서는 육체노동자에게 시민의 자격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무릇 시민이란 자유로이 고귀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먹고 살기 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노동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좋은 시민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그래서 그는 육체노동은 노예에게 맡기고 시민들은 비천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정치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같이 책을 읽는 학생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어김없이 비판한다.토론이 이어지면 학생들의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노예노동에 기반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까지 비화된다.당시의 그리스 시민들이 아무리 경이적인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를 누리고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노예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노예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문화,누군가를 노예상태에 빠뜨림으로써만 실현되는 몇몇 사람들의 삶의 탁월함은,아무리 아름답고 고상한 외관을 띠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참된 이상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이 땅의 노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온전한 시민의 자격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한때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던 이른바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 노조간부들을 향해 귀족노동자라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세상물정 모르는 나는 어느새 이 나라가 노동자들의 천국이 되었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전 노동조합 없는 기업으로 악명 높은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야만의 시대가 정말로 끝난 모양이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부산의 한진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의 노조 위원장이 무려 129일 동안 크레인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다가 자살했다는 보도를 보면서,그리고 간신히 만들어진 삼성 계열사의 노동조합이 회사 측의 집요한 방해공작 결과,탄생한 지 한 달 만에 실질적으로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가 과연 2300여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노동자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노예화했다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보도에 따르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을 자살에 이르게 했던 직접적 원인의 하나는 이즈음 유행처럼 번지는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소송 및 재산 가압류 소송이었다 한다.현재 노조활동과 관련해서 회사 측에서 노조에 손해배상 및 가압류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전국 44개 사업장에 금액으로는 무려 17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민간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정부까지도 지난 7월 파업을 벌인 철도노조에 대해 7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라고 하니,이제는 파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동자가 자기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자기의 목숨을끊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죽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노동자의 파업권을 온갖 구실로 탄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손해배상과 가압류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파업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나라에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시민이 아니라 사로잡힌 노예일 뿐이다.

그리스 민주주의가 노예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듯이,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시민의 자유가 아무리 확장된다 하더라도,노동자가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막연한 환상에서 깨어나 노동자가 진정으로 시민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김 상 봉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
2003-10-2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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