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가방끈으로도 꿈★은 이룰 수 있다.’학력이 능력의 척도인 우리 사회에서 학벌의 열세를 딛고 정상에 오른 최고경영자(CEO)들이 늘고 있다.고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고등학교를 나와 늦깎이로방송통신대학 등에서 공부한 CEO가 적지 않다.이들은 때로는 좌절과 실패로‘밑바닥 인생’까지 추락하기도 했지만 한순간도 도전정신과 꿈을 버리지않은 공통점을 안고 있다.몸에 밴 성실과 노력을 앞세워 각종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능력으로 대접받는 ‘성공 신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학벌은 극복의 대상이지 결코 한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2000년 미국 유수의 MBA 출신들을 제치고 첫 아시아 현지인 사장으로 발탁된 그는 2년만에 BMW코리아 매출을 3배 이상 올렸다.올해 매출은 3000억원을 웃돌 전망이다.연 평균 매출성장률은 70%.
지난 75년 덕수상고를 졸업한 뒤 하트포드 화재보험에 입사,외국계기업에첫 발을 내디뎠다.제약업체인 한국신텍스(현 한국로슈)로 자리를 옮겨 회계전문가로성장한 그는 30대에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BMW에 합류한 것은 지난 95년.자동차 마니아였던 김 사장은 한달간 밤을 샌 끝에 한국시장진출전략을 직접 만들어 독일 BMW본사를 찾았다.BMW는 전문가 수준을 뛰어넘는 분석에 매료돼 재무담당 최고경영자(CFO)라는 중책을 맡겼다.
외환위기로 한차례 고비를 넘긴 김 사장은 고객밀착 마케팅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BMW를 한국 수입차 시장점유율 1위로 끌어올렸다.“모든 아이디어는 고객으로부터 나온다.”며 300∼400명의 고객을 직접 만났다.
서비스센터에서 차를 고치는 동안 무료하게 잡지를 뒤적이던 의사 고객을보고 나서 ‘대차 서비스’를 착안해 냈다.수리기간에 다른 차를 무료로 빌려주자는 것이었다.수리상황이 궁금한 고객을 위해 대기실에 CCTV를 설치,차량 수리 과정을 한눈에 파악토록 해주는 시스템도 구축했다.변호사·의사 등 직업군에 맞게 서로 다른 리스나 할부금융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고객들의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김 사장은 요즘도 지방 출장을 갈 때면 어김없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고객들의 요구를 더욱 정확히 파악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종규 부산롯데호텔사장
이사장이 부산롯데호텔 CEO가 되기까지의 역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한다.어린 시절의 극심한 가난탓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무지게를 지고 다녀야 했다.학교를 빠지고 농사일을 도운 것도 다반사였다.그렇지만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마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8년 롯데제과에 입사했다.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며 성실성을 인정받아 입사 21년만에 이사직에 올랐다.
시련도 있었다.이사로 승진한지 2년만에 직위해제를 당했다.판매촉진 회의도중 사장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23년간 몸바쳤던 직장에서 쫓겨났다.하지만 이같은 원칙주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그는 잠시 호텔롯데 상임감사직을 맡다가 롯데캐논 영업본부장으로 옮겨 만년 적자였던 회사를 정상화 시키는데 주력했다.99년에는 롯데삼강 대표이사로 취임,드디어 꿈을 이루게 됐다.당시 적자기업이었던 롯데삼강을 300억원의 흑자기업으로 돌려놓고,2000%를 웃돌던 부채비율을 72%로 낮추는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올 3월 부산롯데호텔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일에 파묻혀살고 있다.지금도 소파와 같은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을 거부한다.몸이 편해지면 마음이 나태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직장 생활 35년의 증표는 엉덩이의 시커먼 굳은살이다.직장생활에서 얻는 ‘훈장’으로 여긴다.
그는 아직도 월급 봉투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한다.여러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이제껏 받아온 월급 봉투와 명세서를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뒀다.롯데제과 입사 당시에 받은 사령장과 1만 3400원의 첫 월급 봉투를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한다.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조사장은 최연소 과장,차장,부장을 거쳐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기업 음료계열사의 최고경영자에 올랐다.샐러리맨들의 우상인 셈이다.
그는 음료업계의 ‘무서운 젊은이’로 통한다.거침없는 성격에 몰아붙이는힘이 대단하다.그래서 별명이 ‘생각하는 불도저’이다.
명성에 비춰볼 때 이력은 빈약하기 그지없다.상고 출신으로 입사 뒤 겨우야간대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야 했던 어린시절은 두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다.
1995년 그룹 기조실에서 팀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특명이 떨어졌다.창사 이래 ‘골칫덩어리’였던 웅진식품에서 ‘돈 되는 물건’을 만들어 보라는 지시였다.당시 인삼드링크 제품을 생산하던 웅진인삼(현 웅진식품)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렸다.조사장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추음료 ‘가을대추’를 개발,시판한지 6개월도 안돼 2000억원대의 거대 음료시장을 창출했다.회사의 연간 매출은 50억원대에서 1년만에 35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조사장의 성공가도에 작은 실패들도 없지 않았다.‘가을대추’ 성공에 자신을 얻어 내놓은 ‘여름수박’은 매출부진에 허덕였다.더구나 새로 영입된 경영진과의 갈등은 그를 웅진식품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것도 잠시.그는 99년 웅진식품 사장으로 원대복귀했다.하지만 재정 상태가 최악의 상황이어서 추가 투자는 엄두도 못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장은 쌀음료 ‘아침햇살’을 내놓으며 단번에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자신이 먼저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절대 내다 팔지 않는다.’
박회장은 관·재계를 두루 경험한 CEO다.1922년 함흥공립상업고를 졸업한뒤 당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입사해 24년동안 근무했다.이후 관계에 진출,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현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
선친이 작고하면서 샘표식품의 경영을 맡은 것이 사업 인생의 시작이었다.
비록 늦게 기업경영을 시작했지만 장류업계의 선두주자로 샘표식품을 키워오기까지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교우와 이력,그리고 장인정신이 뒤받침됐다.
샘표식품이 창사 이래 3차례에 걸친 ‘간장파동’을 극복한 것은 박회장의평소 소신인 ‘신용 경영’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개인 돈과 회사 돈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연초에 사원들에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돈을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라.’는것이다.
그는 ‘자린고비’로 불릴 정도로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간혹 간장 회사이기 때문에 ‘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그는 26년간 샘표식품을 경영하면서 회사를 간장 생산량 국내 1위,세계 3위의 식품회사로 키워냈다.또 양적인 성장 못지 않게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제품을 만드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덕분에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ISO 9001 및 ISO 14001 인증을 받았다.
산업팀 종합
***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2000년 미국 유수의 MBA 출신들을 제치고 첫 아시아 현지인 사장으로 발탁된 그는 2년만에 BMW코리아 매출을 3배 이상 올렸다.올해 매출은 3000억원을 웃돌 전망이다.연 평균 매출성장률은 70%.
지난 75년 덕수상고를 졸업한 뒤 하트포드 화재보험에 입사,외국계기업에첫 발을 내디뎠다.제약업체인 한국신텍스(현 한국로슈)로 자리를 옮겨 회계전문가로성장한 그는 30대에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BMW에 합류한 것은 지난 95년.자동차 마니아였던 김 사장은 한달간 밤을 샌 끝에 한국시장진출전략을 직접 만들어 독일 BMW본사를 찾았다.BMW는 전문가 수준을 뛰어넘는 분석에 매료돼 재무담당 최고경영자(CFO)라는 중책을 맡겼다.
외환위기로 한차례 고비를 넘긴 김 사장은 고객밀착 마케팅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BMW를 한국 수입차 시장점유율 1위로 끌어올렸다.“모든 아이디어는 고객으로부터 나온다.”며 300∼400명의 고객을 직접 만났다.
서비스센터에서 차를 고치는 동안 무료하게 잡지를 뒤적이던 의사 고객을보고 나서 ‘대차 서비스’를 착안해 냈다.수리기간에 다른 차를 무료로 빌려주자는 것이었다.수리상황이 궁금한 고객을 위해 대기실에 CCTV를 설치,차량 수리 과정을 한눈에 파악토록 해주는 시스템도 구축했다.변호사·의사 등 직업군에 맞게 서로 다른 리스나 할부금융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고객들의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김 사장은 요즘도 지방 출장을 갈 때면 어김없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고객들의 요구를 더욱 정확히 파악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종규 부산롯데호텔사장
이사장이 부산롯데호텔 CEO가 되기까지의 역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한다.어린 시절의 극심한 가난탓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무지게를 지고 다녀야 했다.학교를 빠지고 농사일을 도운 것도 다반사였다.그렇지만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마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8년 롯데제과에 입사했다.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며 성실성을 인정받아 입사 21년만에 이사직에 올랐다.
시련도 있었다.이사로 승진한지 2년만에 직위해제를 당했다.판매촉진 회의도중 사장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23년간 몸바쳤던 직장에서 쫓겨났다.하지만 이같은 원칙주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그는 잠시 호텔롯데 상임감사직을 맡다가 롯데캐논 영업본부장으로 옮겨 만년 적자였던 회사를 정상화 시키는데 주력했다.99년에는 롯데삼강 대표이사로 취임,드디어 꿈을 이루게 됐다.당시 적자기업이었던 롯데삼강을 300억원의 흑자기업으로 돌려놓고,2000%를 웃돌던 부채비율을 72%로 낮추는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올 3월 부산롯데호텔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일에 파묻혀살고 있다.지금도 소파와 같은 푹신한 의자에 앉는 것을 거부한다.몸이 편해지면 마음이 나태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직장 생활 35년의 증표는 엉덩이의 시커먼 굳은살이다.직장생활에서 얻는 ‘훈장’으로 여긴다.
그는 아직도 월급 봉투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한다.여러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이제껏 받아온 월급 봉투와 명세서를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뒀다.롯데제과 입사 당시에 받은 사령장과 1만 3400원의 첫 월급 봉투를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한다.
***조운호 웅진식품 사장
조사장은 최연소 과장,차장,부장을 거쳐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기업 음료계열사의 최고경영자에 올랐다.샐러리맨들의 우상인 셈이다.
그는 음료업계의 ‘무서운 젊은이’로 통한다.거침없는 성격에 몰아붙이는힘이 대단하다.그래서 별명이 ‘생각하는 불도저’이다.
명성에 비춰볼 때 이력은 빈약하기 그지없다.상고 출신으로 입사 뒤 겨우야간대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야 했던 어린시절은 두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다.
1995년 그룹 기조실에서 팀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특명이 떨어졌다.창사 이래 ‘골칫덩어리’였던 웅진식품에서 ‘돈 되는 물건’을 만들어 보라는 지시였다.당시 인삼드링크 제품을 생산하던 웅진인삼(현 웅진식품)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렸다.조사장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추음료 ‘가을대추’를 개발,시판한지 6개월도 안돼 2000억원대의 거대 음료시장을 창출했다.회사의 연간 매출은 50억원대에서 1년만에 35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조사장의 성공가도에 작은 실패들도 없지 않았다.‘가을대추’ 성공에 자신을 얻어 내놓은 ‘여름수박’은 매출부진에 허덕였다.더구나 새로 영입된 경영진과의 갈등은 그를 웅진식품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것도 잠시.그는 99년 웅진식품 사장으로 원대복귀했다.하지만 재정 상태가 최악의 상황이어서 추가 투자는 엄두도 못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장은 쌀음료 ‘아침햇살’을 내놓으며 단번에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
‘자신이 먼저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절대 내다 팔지 않는다.’
박회장은 관·재계를 두루 경험한 CEO다.1922년 함흥공립상업고를 졸업한뒤 당시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입사해 24년동안 근무했다.이후 관계에 진출,초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현 국무조정실장)을 지냈다.
선친이 작고하면서 샘표식품의 경영을 맡은 것이 사업 인생의 시작이었다.
비록 늦게 기업경영을 시작했지만 장류업계의 선두주자로 샘표식품을 키워오기까지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교우와 이력,그리고 장인정신이 뒤받침됐다.
샘표식품이 창사 이래 3차례에 걸친 ‘간장파동’을 극복한 것은 박회장의평소 소신인 ‘신용 경영’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개인 돈과 회사 돈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연초에 사원들에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돈을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라.’는것이다.
그는 ‘자린고비’로 불릴 정도로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간혹 간장 회사이기 때문에 ‘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그는 26년간 샘표식품을 경영하면서 회사를 간장 생산량 국내 1위,세계 3위의 식품회사로 키워냈다.또 양적인 성장 못지 않게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제품을 만드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덕분에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ISO 9001 및 ISO 14001 인증을 받았다.
산업팀 종합
2002-12-2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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