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재촉이나 하듯이 주말을 끼고 한 이틀 비가 내렸다.얼마 전 온 나라가 진저리를 쳤던 비 피해가 떠올라 빗방울이 조금만 굵어져도 불안했다.
추수를 앞둔 시기라 더욱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도 별 문제는 없었다.내린 비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안도는 하였지만 여전히 재해로부터의 안전망이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의 과실을 다급하게 얻으려는 조바심이 앞서,기본에 충실하기를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다.
재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대충적당주의는 정부정책과 일상생활에 깊숙이 뿌리내려 좀처럼 치유하기 어려운 도덕적 해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지난번 기록적인 수재 피해를 당하고도 그 대책은 여전히 국면 회피적이고 국민정서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였다.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특별재해지역을 선포하고,피해가구당 몇백만원의 보조금을 주고,망가진 도로와 다리를 복구하는 일이 전부였다.당장 급한 불을 끄는 대책들이라 이것을 나무랄 까닭은 없다.그러나 재해가 날 때마다 재발방지를 위한 약속이 남발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비슷한 재해가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그 어디에도 재발 방지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에 관한 정책적 움직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엄청난 인명과 천문학적인 재산 재해를 당하고도 제대로 된 정책 공청회나 세미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월드컵 이후 한국사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기저기서 너나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며 개최하던 세미나를 생각해 보면 매우 대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재해가 날 때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만 안전사회를 향한 청사진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그동안 우리는 재해가 터지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문제해결적인 접근보다 국면회피를 위해 애국심을 볼모로 국민 정서에 호소해 왔다.국민의 동참정도를 재해 대책의 성패 기준으로 삼으면서 말이다.언제까지 이런 방식이 통용될지 의문스럽다.
물론 수재의연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문제는 국민의 성금이 문제해결의 관건인 양 위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는 데 있다.프로골프 선수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누구는 얼마 냈고,누구는 얼마 냈고 하는 기사화는 수재의연금의 액수가 마치 애국심의 표시인 양 몰아가는 천박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정서에만 의존하는 대책으로는 재해공화국의 오명을 벗기는 어려우며 반복되는 재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는 더더욱 어렵다.정부의 임시 방편적인 재해정책이나 수재의연금에 의한 국민정서적 접근 모두 일회성,이벤트성,전시행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언제 닥쳐올지 모를 재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까지 자연을 원망하며,몇십년에 한번 온 폭우니 태풍이니 하며 운수타령식의 얘기만 계속할 것인가 말이다.몇십년만의 한번이라는 무책임한 확률이 피해 당사자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는 일이다.
재해로부터의 안전이 삶의 질의 중요 항목임을 명심하여야 한다.이제부터라도 졸속적인 근대화의 멘털리티와 관행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다.경기장마다 대한민국의 함성이 우렁차다.‘새로운 비전,새로운 아시아’가 월드컵의 자부심과 어우러져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닌가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세계적인 축제를 주최하면서 안전사회를 향한 우리의 준비는 어느 정도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선진사회와 후진사회의 차이가 무엇인가.언제 올지 모를 어려운 때를 위해 무언가 조금씩 준비하고 모아두는 사회와 그러하지 않는 사회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추수가 한창인 풍요의 계절이다.혹독했던 지난 계절을 기억하며 안전사회를 위한 시스템 차원에서의 디자인이 절실히 요구된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 사회학
추수를 앞둔 시기라 더욱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도 별 문제는 없었다.내린 비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안도는 하였지만 여전히 재해로부터의 안전망이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의 과실을 다급하게 얻으려는 조바심이 앞서,기본에 충실하기를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다.
재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대충적당주의는 정부정책과 일상생활에 깊숙이 뿌리내려 좀처럼 치유하기 어려운 도덕적 해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지난번 기록적인 수재 피해를 당하고도 그 대책은 여전히 국면 회피적이고 국민정서에 호소하는 것이 전부였다.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특별재해지역을 선포하고,피해가구당 몇백만원의 보조금을 주고,망가진 도로와 다리를 복구하는 일이 전부였다.당장 급한 불을 끄는 대책들이라 이것을 나무랄 까닭은 없다.그러나 재해가 날 때마다 재발방지를 위한 약속이 남발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비슷한 재해가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그 어디에도 재발 방지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에 관한 정책적 움직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엄청난 인명과 천문학적인 재산 재해를 당하고도 제대로 된 정책 공청회나 세미나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월드컵 이후 한국사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기저기서 너나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며 개최하던 세미나를 생각해 보면 매우 대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재해가 날 때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만 안전사회를 향한 청사진은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그동안 우리는 재해가 터지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문제해결적인 접근보다 국면회피를 위해 애국심을 볼모로 국민 정서에 호소해 왔다.국민의 동참정도를 재해 대책의 성패 기준으로 삼으면서 말이다.언제까지 이런 방식이 통용될지 의문스럽다.
물론 수재의연금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문제는 국민의 성금이 문제해결의 관건인 양 위기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는 데 있다.프로골프 선수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누구는 얼마 냈고,누구는 얼마 냈고 하는 기사화는 수재의연금의 액수가 마치 애국심의 표시인 양 몰아가는 천박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정서에만 의존하는 대책으로는 재해공화국의 오명을 벗기는 어려우며 반복되는 재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는 더더욱 어렵다.정부의 임시 방편적인 재해정책이나 수재의연금에 의한 국민정서적 접근 모두 일회성,이벤트성,전시행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언제 닥쳐올지 모를 재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까지 자연을 원망하며,몇십년에 한번 온 폭우니 태풍이니 하며 운수타령식의 얘기만 계속할 것인가 말이다.몇십년만의 한번이라는 무책임한 확률이 피해 당사자에게는 모든 것을 빼앗는 일이다.
재해로부터의 안전이 삶의 질의 중요 항목임을 명심하여야 한다.이제부터라도 졸속적인 근대화의 멘털리티와 관행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다.경기장마다 대한민국의 함성이 우렁차다.‘새로운 비전,새로운 아시아’가 월드컵의 자부심과 어우러져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닌가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세계적인 축제를 주최하면서 안전사회를 향한 우리의 준비는 어느 정도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선진사회와 후진사회의 차이가 무엇인가.언제 올지 모를 어려운 때를 위해 무언가 조금씩 준비하고 모아두는 사회와 그러하지 않는 사회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추수가 한창인 풍요의 계절이다.혹독했던 지난 계절을 기억하며 안전사회를 위한 시스템 차원에서의 디자인이 절실히 요구된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 사회학
2002-10-08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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