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출신으로 평생 고향과 조국을 위해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몸바친 손무상(孫戊尙)옹이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고향민들이 장례를 치른다.
고인이 지난 8일 고향집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은 ‘고암면민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추진위원회(金榮天 면장)를 구성했다.
면민들은 당초 군민장을 추진했으나 가족장을 고집하던 유족들을 어렵게 설득했다.장례식은 12일 오전.
손옹은 1909년 고암면 중대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독학하다 24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직공으로 일하다 부지런하고,성실한 생활태도를 눈여겨 본 일본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6년 만에 교토(京都)에서 자그마한 염색공장을 운영하게 됐다.특유의 근면함과 신용으로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날로 확장돼 50년에는 4개 회사를 거느린 중견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8년 만인 지난 57년 귀국한 고인은 서울에 섬유회사와 염직공장을 설립,조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이때 고향을 찾은 그는 한국전쟁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아가는 고향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보고 고향돕기에 나섰다.손옹은 당시 ‘후생주택’100가구를 건립해 이들을 입주시키고,농경지 24만여㎡를 사들여 경작하게 했다.
또 농촌근대화에는 전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창녕읍에서 고암면까지 6㎞에 이르는 전기 가설비를 선뜻 내놓았다.
고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육영사업에 뛰어들어 많이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풀었다.69년 고향에 유치원을 설립한 데 이어 고암중학교와 창녕종고(현창녕공고의 전신)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나섰다.78년에는 중야장학재단을 설립,우수 기술자에게 외국 연수기회를 주는 등 인재발굴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손옹은 이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7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94년에는 창녕군민대상을 받았다.
고향 면민들은 “손옹이 별세한 것은 지역의 큰별이 떨어진 사건”이라며“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고향돕기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큰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창녕 이정규기자 jeong@
고인이 지난 8일 고향집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은 ‘고암면민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장례추진위원회(金榮天 면장)를 구성했다.
면민들은 당초 군민장을 추진했으나 가족장을 고집하던 유족들을 어렵게 설득했다.장례식은 12일 오전.
손옹은 1909년 고암면 중대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독학하다 24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직공으로 일하다 부지런하고,성실한 생활태도를 눈여겨 본 일본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6년 만에 교토(京都)에서 자그마한 염색공장을 운영하게 됐다.특유의 근면함과 신용으로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날로 확장돼 50년에는 4개 회사를 거느린 중견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8년 만인 지난 57년 귀국한 고인은 서울에 섬유회사와 염직공장을 설립,조국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이때 고향을 찾은 그는 한국전쟁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아가는 고향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보고 고향돕기에 나섰다.손옹은 당시 ‘후생주택’100가구를 건립해 이들을 입주시키고,농경지 24만여㎡를 사들여 경작하게 했다.
또 농촌근대화에는 전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창녕읍에서 고암면까지 6㎞에 이르는 전기 가설비를 선뜻 내놓았다.
고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육영사업에 뛰어들어 많이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풀었다.69년 고향에 유치원을 설립한 데 이어 고암중학교와 창녕종고(현창녕공고의 전신)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나섰다.78년에는 중야장학재단을 설립,우수 기술자에게 외국 연수기회를 주는 등 인재발굴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손옹은 이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7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94년에는 창녕군민대상을 받았다.
고향 면민들은 “손옹이 별세한 것은 지역의 큰별이 떨어진 사건”이라며“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고향돕기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은 큰 어른이었다.”고 회고했다.
창녕 이정규기자 jeong@
2002-07-12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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