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펴내 뜨거운 ‘공자 논쟁’의 불씨를 지핀 김경일 상명대 중문과교수가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바다출판사)라는 책을 내놓았다.
자칭 “족보상으로도 하자가 없고(?) 학문적으론 박사에 교수요,쓴 책이 10여권이 넘는다”는 지은이가 ‘공자 필사론’에 양이 차지 않은 듯 야만적 이미지로 그득한 ‘오랑캐’와 그 정신을 찬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위해 먼저 지은이의 현실 진단을 살펴보자.그에따르면 다문화(多文化)와 다언어(多言語)의 세계화시대에 한국은 무(無)대책이라는 것이다.중국과 일본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변신을 모색하는데 ‘변두리 국가’인 한국은아직 ‘보부상’보다는 ‘선비’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런 갑갑한 현실을 낳은 주범을 중국과 그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인 유교로 본다.소신인 ‘유교 망국론’의 유효성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여보란듯 내놓는 보따리 속에는 ‘오랑캐 정신’이 들어있다.“생명력,창조성,역동성,포용력”을 핵심으로 하는오랑캐 정신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지은이에 따르면 원래 오랑캐였던 우리 민족(저자는 동이(東夷)를 예로든다)이갖고 있던 에너지인데 유교문화의 헤게모니에 밀려 잃어버린 원형질 같은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역사적인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분석한다.오랑캐로서 한족이 지배하는 중원에 깃발을 꼽은 여진족장 아골타와 몽고족장 칭기즈칸의 전략과 그 속에 깃든 지혜를 배우자고 제안한다.
한족은 오랑캐를 의도적으로 배척했고 그들 정신의 고갱이인 ‘실용주의’를 무시하는 가치관이 한반도로 직수입됐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한마디로 중국이 무서워,살아남기 위해 ‘중원은 찰떡 동이(東夷)는 개떡’이라는 역사관으로 눈에 콩깍지를 씌운 상흔(傷痕)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역사는 “중국 경전 몇권 붙들고 학문하다 사라진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들이 목화씨를 들여와 민초들의몸을 따뜻하게 해준 문익점이나 측우기,금속활자 등을 개발한 장영실 등보다 더 존경받게 되었다”고 본다.
이런 비판은 현실에서 ‘영어공용화’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이를 위해 ‘된장’(만주어)‘아씨’‘연지 곤지’(이상 흉노어)등 우리 말이 우리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게다가우리 말의 대부분이 한자나 일본어에 의해 잡아먹힌 것이 현실인데 우리 말에 목숨 걸기보다는 국제적 경쟁력을 위해 열린 자세로 영어를 받아들이자는 논지를 편다.물론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여도 우리 특유의 ‘말맛’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목숨 걸고 썼다”는 ‘유교가…’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찾기로 볼 수 있다.표현이 많이 걸러졌지만 여전히 도발적인 주장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종수기자 vielee@
자칭 “족보상으로도 하자가 없고(?) 학문적으론 박사에 교수요,쓴 책이 10여권이 넘는다”는 지은이가 ‘공자 필사론’에 양이 차지 않은 듯 야만적 이미지로 그득한 ‘오랑캐’와 그 정신을 찬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답을 찾기위해 먼저 지은이의 현실 진단을 살펴보자.그에따르면 다문화(多文化)와 다언어(多言語)의 세계화시대에 한국은 무(無)대책이라는 것이다.중국과 일본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변신을 모색하는데 ‘변두리 국가’인 한국은아직 ‘보부상’보다는 ‘선비’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런 갑갑한 현실을 낳은 주범을 중국과 그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인 유교로 본다.소신인 ‘유교 망국론’의 유효성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여보란듯 내놓는 보따리 속에는 ‘오랑캐 정신’이 들어있다.“생명력,창조성,역동성,포용력”을 핵심으로 하는오랑캐 정신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지은이에 따르면 원래 오랑캐였던 우리 민족(저자는 동이(東夷)를 예로든다)이갖고 있던 에너지인데 유교문화의 헤게모니에 밀려 잃어버린 원형질 같은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역사적인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분석한다.오랑캐로서 한족이 지배하는 중원에 깃발을 꼽은 여진족장 아골타와 몽고족장 칭기즈칸의 전략과 그 속에 깃든 지혜를 배우자고 제안한다.
한족은 오랑캐를 의도적으로 배척했고 그들 정신의 고갱이인 ‘실용주의’를 무시하는 가치관이 한반도로 직수입됐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한마디로 중국이 무서워,살아남기 위해 ‘중원은 찰떡 동이(東夷)는 개떡’이라는 역사관으로 눈에 콩깍지를 씌운 상흔(傷痕)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역사는 “중국 경전 몇권 붙들고 학문하다 사라진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들이 목화씨를 들여와 민초들의몸을 따뜻하게 해준 문익점이나 측우기,금속활자 등을 개발한 장영실 등보다 더 존경받게 되었다”고 본다.
이런 비판은 현실에서 ‘영어공용화’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이를 위해 ‘된장’(만주어)‘아씨’‘연지 곤지’(이상 흉노어)등 우리 말이 우리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게다가우리 말의 대부분이 한자나 일본어에 의해 잡아먹힌 것이 현실인데 우리 말에 목숨 걸기보다는 국제적 경쟁력을 위해 열린 자세로 영어를 받아들이자는 논지를 편다.물론 영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여도 우리 특유의 ‘말맛’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목숨 걸고 썼다”는 ‘유교가…’에 걸맞는 현실적인 대안찾기로 볼 수 있다.표현이 많이 걸러졌지만 여전히 도발적인 주장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종수기자 vielee@
2001-11-07 1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