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의 아름다운 죽음이 한·일 양국을 감동시키고 있다.도쿄전철역에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철로에 뛰어들었다 숨진 한국대학생 이수현씨의 죽음은 국경을 초월한 인간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은 한·일간의 감정의벽을 무너뜨렸다. 한국과 일본은 하나가 되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있다.
이씨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오늘도 수많은 애도의 글이 오르고 있다.그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추모의 글로 가득하다.수십만명의 네티즌들이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있다.인터넷에 올라 있는 이씨의 여자친구 한정임씨가 쓴 ‘천국에 있을 나의 수현이’라는 제목의 애절한 글은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일본 열도에도 애도의 물결이 넘쳐 흐른다.일본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조의금 모금계좌를 싣는 신문도 있다.일본 방송도 매일 특집방송을 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다녀갔고 영결식에도 1,000여명이 참석했다.모리 요시로 일본총리와 고노 요헤이외상 등 정치지도자들도 영결식에 참석,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모리총리는 이씨 부모에게 “한·일관계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할 수있는 유능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의로운 일에 목숨을 잃게 돼서 안타깝다.이씨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일본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은 특히 국적이 다른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한국 젊은이의희생정신에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훌륭한 청년을 키워낸 한국에 친밀감을 느낀다는 일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언론들은전한다.일본인들은 그의 죽음에서 일본사회가 잃어버린 ‘열린 마음과 남을 위하는 희생정신’을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일본인들은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과 감정의 벽을 초월하여 이씨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그러한 순수한 애도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다가온다.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일본관’을 바꾸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그러나 세월의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일본에는또 다른 얼굴이 있다.이수현씨가 죽은 도쿄에서 지난해 12월 일본군의 군대위안부 문제 등을 다룬 ‘여성 국제전범 법정’이 열렸다.군대위안부는 일본이 저지른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다.여성 국제전범 법정은 “2차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는 군대위안부 동원 등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다.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도쿄법정과 천황의 유죄 판결에 거의 침묵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일본인을 위해 죽은 한국인의 희생에는 깊은 애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일본인들의 순수한 애도의 마음과 과거사를 연계시키는 것은 이씨의 거룩한 죽음을 오히려 훼손하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물론 과거사와이씨의 죽음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이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만으로 끝내기에는 그의 죽음이 너무 값진 것은 아닐까.이씨의 죽음은모처럼 한·일간의 공감대를 만들었다.그 공감대가 양국관계를 질적으로 한단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그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위해 일본과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꿈이 실현되려면 일본은 이씨의 숭고한 죽음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역사는 이씨의 거룩한 죽음 하나로 채워지는것이 아니다.
과거의 침략행위는 잊고 이씨의 죽음만을 기억하려 한다면 그의 숭고한 희생도 머지않아 세월의 여울에 씻겨 망각의 커튼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과거에 대한 반성과 이씨의 거룩한 희생의 뜻이 조화를이룰 때 그의 죽음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튼실한 다리가 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젊은 나이에생을 마감한 것은 슬픈 일이다.그의 영전에 국화꽃 한송이를 바친다.
이창순 위원 cslee@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은 한·일간의 감정의벽을 무너뜨렸다. 한국과 일본은 하나가 되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있다.
이씨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오늘도 수많은 애도의 글이 오르고 있다.그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추모의 글로 가득하다.수십만명의 네티즌들이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있다.인터넷에 올라 있는 이씨의 여자친구 한정임씨가 쓴 ‘천국에 있을 나의 수현이’라는 제목의 애절한 글은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일본 열도에도 애도의 물결이 넘쳐 흐른다.일본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연일 대서특필하고 조의금 모금계좌를 싣는 신문도 있다.일본 방송도 매일 특집방송을 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다녀갔고 영결식에도 1,000여명이 참석했다.모리 요시로 일본총리와 고노 요헤이외상 등 정치지도자들도 영결식에 참석,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모리총리는 이씨 부모에게 “한·일관계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할 수있는 유능한 인재라고 들었는데 의로운 일에 목숨을 잃게 돼서 안타깝다.이씨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일본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은 특히 국적이 다른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한국 젊은이의희생정신에 존경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훌륭한 청년을 키워낸 한국에 친밀감을 느낀다는 일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언론들은전한다.일본인들은 그의 죽음에서 일본사회가 잃어버린 ‘열린 마음과 남을 위하는 희생정신’을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일본인들은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과 감정의 벽을 초월하여 이씨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그러한 순수한 애도는 한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다가온다.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일본관’을 바꾸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그러나 세월의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일본에는또 다른 얼굴이 있다.이수현씨가 죽은 도쿄에서 지난해 12월 일본군의 군대위안부 문제 등을 다룬 ‘여성 국제전범 법정’이 열렸다.군대위안부는 일본이 저지른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다.여성 국제전범 법정은 “2차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는 군대위안부 동원 등에 관한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다.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도쿄법정과 천황의 유죄 판결에 거의 침묵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일본인을 위해 죽은 한국인의 희생에는 깊은 애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일본인들의 순수한 애도의 마음과 과거사를 연계시키는 것은 이씨의 거룩한 죽음을 오히려 훼손하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물론 과거사와이씨의 죽음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이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만으로 끝내기에는 그의 죽음이 너무 값진 것은 아닐까.이씨의 죽음은모처럼 한·일간의 공감대를 만들었다.그 공감대가 양국관계를 질적으로 한단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그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위해 일본과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꿈이 실현되려면 일본은 이씨의 숭고한 죽음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역사는 이씨의 거룩한 죽음 하나로 채워지는것이 아니다.
과거의 침략행위는 잊고 이씨의 죽음만을 기억하려 한다면 그의 숭고한 희생도 머지않아 세월의 여울에 씻겨 망각의 커튼 속으로 사라질지 모른다.과거에 대한 반성과 이씨의 거룩한 희생의 뜻이 조화를이룰 때 그의 죽음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튼실한 다리가 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젊은 나이에생을 마감한 것은 슬픈 일이다.그의 영전에 국화꽃 한송이를 바친다.
이창순 위원 cslee@
2001-02-0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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