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문학’이라는 형태로 추구해 왔던 것은 무엇일까? 왜 인류는 이형식에 유난히 큰 기대를 걸어왔던 것일까? 왜 인류는 작가에게,화가나 음악가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엄밀하게 ‘시대의 판단’과 ‘시대의 예언자’가 되기를 요청해 왔던 것일까? 그것은,‘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때문이다.언어는 가장 확실하게 로고스를 유형화하는 수단이며,그것을 넘어서 미래까지 투시하는 예지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오랫동안 ‘지성’과 동의어였으며,문학을 하는 사람은 ‘지성인’과 동의어였다.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통은 80년대까지 유지됐다.문인들은 일제와 맞서 싸웠으며,독재에 항거했고,잡혀가 얻어맞고,투옥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는 동안 한국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 고유의 기능을 유보시켜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문학 고유의 기능,또는 문학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사회에 대한 발언’이다,아니다.‘문학 특유의 언어 미학’이다.전자의 견해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후자의 견해는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어쨌든 우리나라에서 통용돼 왔던 분류법에 따르면 그렇다.그리고 양 진영 사이에서 ‘순수냐 참여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적 문맥 안에서 이 두 경향은 우리나라에서처럼 상반되는 것이아니었다.왜냐하면 첨단의 언어의식과 미의식은 저절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그렇게 살펴보면 ‘순수문학’도 ‘참여문학’도없다.모든 좋은 문학은 참여문학이다.즉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발언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언어의식과 자아의식이다.이렇게 어렵게 말할 것도 없다.내가 누구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또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왜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80년대 내내 독재에 항거하느라고 리얼리즘에 꼬박 매달려 있었다.‘현실에 대한 발언’만이 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는 바람에 언어의식은 형편없이 뒷걸음쳤다.리얼리즘의 편류는 문학적으로우리 사회를 너무나 황폐하게만들었다.지금 평균 독자들은 최소한의 은유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그나마 1930년대 이래 꾸준히 발생해 왔던 한국의 모더니즘 전통은 완전히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 같다.물밑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이 있다.그러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현장비평가들은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첨단 언어들을 손도 대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몇몇 문인들을 ‘스타’로 만든 출판사나 비평가들은 그들이 상당히 ‘모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그들의문학은 거의 모두 약간 변형된,아니 오히려 변질된 리얼리즘이다.대중에게영합하기 위해 감상주의로 포장한 ‘리얼리즘 당의정’이다.따라서 그들에게 언어의식도 자아의식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90년대 들어 대중 앞에 내세워진 문인들은 거의 연예인 수준이다.그들은 대중을 즐겁게 해주고,그 대가로 명성을 얻고 돈을 번다.문인은 이제 지식인도 행동인도 아니고 다만 ‘문학상품 생산자’에 불과할 뿐이다.문학비평가들도,언론도 ‘잘 팔리는 상품 생산자’인 문인들만 대중에게 소개할 뿐이다.
이제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으니,싸워야 할 대상이 없는 것일까? 그러니 즐겁게 한 생을 살다 가면 그만일까? 문학에는 이제 대중을 즐겁게 해주어야 할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90년대 한국문학은 스스로에 대한 모독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모독은 문학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모독이다.흥미로운 것은,그 모독의 결과로 어떤 문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서 모독해 마지 않는 삶 안에서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90년대 문학은문학 모독자들의 천국이다.이건 일종의 개그다.신(新)개그다.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문학은 오랫동안 ‘지성’과 동의어였으며,문학을 하는 사람은 ‘지성인’과 동의어였다.우리나라에서도 이 전통은 80년대까지 유지됐다.문인들은 일제와 맞서 싸웠으며,독재에 항거했고,잡혀가 얻어맞고,투옥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는 동안 한국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 고유의 기능을 유보시켜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문학 고유의 기능,또는 문학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다.‘사회에 대한 발언’이다,아니다.‘문학 특유의 언어 미학’이다.전자의 견해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후자의 견해는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어쨌든 우리나라에서 통용돼 왔던 분류법에 따르면 그렇다.그리고 양 진영 사이에서 ‘순수냐 참여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적 문맥 안에서 이 두 경향은 우리나라에서처럼 상반되는 것이아니었다.왜냐하면 첨단의 언어의식과 미의식은 저절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그렇게 살펴보면 ‘순수문학’도 ‘참여문학’도없다.모든 좋은 문학은 참여문학이다.즉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발언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언어의식과 자아의식이다.이렇게 어렵게 말할 것도 없다.내가 누구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또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왜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학은 80년대 내내 독재에 항거하느라고 리얼리즘에 꼬박 매달려 있었다.‘현실에 대한 발언’만이 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는 바람에 언어의식은 형편없이 뒷걸음쳤다.리얼리즘의 편류는 문학적으로우리 사회를 너무나 황폐하게만들었다.지금 평균 독자들은 최소한의 은유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그나마 1930년대 이래 꾸준히 발생해 왔던 한국의 모더니즘 전통은 완전히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 같다.물밑에서는 활발한 움직임이 있다.그러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현장비평가들은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첨단 언어들을 손도 대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몇몇 문인들을 ‘스타’로 만든 출판사나 비평가들은 그들이 상당히 ‘모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그들의문학은 거의 모두 약간 변형된,아니 오히려 변질된 리얼리즘이다.대중에게영합하기 위해 감상주의로 포장한 ‘리얼리즘 당의정’이다.따라서 그들에게 언어의식도 자아의식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90년대 들어 대중 앞에 내세워진 문인들은 거의 연예인 수준이다.그들은 대중을 즐겁게 해주고,그 대가로 명성을 얻고 돈을 번다.문인은 이제 지식인도 행동인도 아니고 다만 ‘문학상품 생산자’에 불과할 뿐이다.문학비평가들도,언론도 ‘잘 팔리는 상품 생산자’인 문인들만 대중에게 소개할 뿐이다.
이제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으니,싸워야 할 대상이 없는 것일까? 그러니 즐겁게 한 생을 살다 가면 그만일까? 문학에는 이제 대중을 즐겁게 해주어야 할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90년대 한국문학은 스스로에 대한 모독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모독은 문학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모독이다.흥미로운 것은,그 모독의 결과로 어떤 문인들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해서 모독해 마지 않는 삶 안에서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90년대 문학은문학 모독자들의 천국이다.이건 일종의 개그다.신(新)개그다.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1999-05-13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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