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황후의 恨(秘錄 南柯夢:18)

순명황후의 恨(秘錄 南柯夢:18)

박성수 기자 기자
입력 1998-07-22 00:00
수정 1998-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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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공방 20년 후사 없어 坤宮 미움사/純宗 음양이치 잘몰라 빈궁 침실 발길 끊어/보다못한 嚴妃 영친왕 시켜 억지合房도 허사/종묘 주춧돌 28칸 반… 나라운수 예언한듯/33세에 쓸쓸히 승하하자 四廟에 큰불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었다.그러나 우연하게 왕실안에 이변이 거듭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조선왕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純宗,1907∼1910)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일이다.순종은 명성황후가 어렵게 나은 외아들이었는데,불행히 여자를 몰랐다.

하루는 어린 영친왕이 함녕전으로 뛰어오더니 순종의 옷소매를 잡고 빈궁(嬪宮=순명황후 민씨)한테 가시자고 졸랐다.본시 순종께서는 음양의 이치(남녀관계)를 잘 모르셔 허송세월만 하고 계신지라 엄비(영친왕의 생모)께서 걱정하시던 끝에 어린 영친왕을 시켜 순종을 억지로 빈궁의 침실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순종은 영친왕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다가 빈궁 침실을 두어걸음 남겨두고 돌아서고 말았다.그러자 어린 영친왕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엄비가 나타나 순종에게 꼭 한번만 빈궁에게 가보시라고 권했다.순종이 난처해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빈궁이 직접 나와서 순종을 자기방으로 모셨다.

순종이 방에 앉자마자 미리 준비해뒀던 주안상이 들어왔다.상궁과 나인 모두가 밖으로 나가 일이 잘 되기를 기원했다.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빈궁으로서는 시집온지 20년만인 이날 처음으로 화촉을 밝히는 것이었으니 운우의 기쁨이 얼마나 그리웠겠는가.그러나 순종께서는 앉은 자리가 뜨뜻해지기도 전에 일어나시더니 함녕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원계보’에 보면 순명황후 민씨는 민태호의 딸로서 11살(임오 1882년)때 태자비로 간택되어 33살(갑진 1904년)에 승하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그사이 22년 동안을 처녀의 몸으로 지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상과부보다 못한 쓸쓸한 일생이었다.

이후에도 밤다다 11시경이면 순종이 빈궁의 침소를 찾았으나 아들을 낳을 희망은 전혀 없었다.도대체 우주만물이 모두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가령 한 마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있어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린 뒤 웃는 낯으로 남자를 바라본다면 아무리 군왕이라 하더라도 쏠리게 마련이고 여색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순종께서는 이것을 모르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순종의 이같은 행동은 국가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일이다.왜냐하면 당초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종묘의 주춧돌을 놓을 때 28칸반으로 정했는데,이로 미루어 본다면 이 나라의 운수는 가히 움직이기 어려운 일인가.

조선왕조 건국시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활약이 컸다.그래서 많은 일화가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묘다.

정도전이 종묘의 칸수를 28칸 반으로 정하고,‘창엽문(蒼葉門)’이란 액자를 단 것은 그가 미리 500년 후의 일을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남가몽·8,4월15일자 참조)

최근 장안에 다음같은 동요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어제 불고 그저께 분 바람은/러시아 군대의 대포소리요/지금 방금 떨어지는 달은 빈궁전하의 운명이로다’(昨日再昨吹去風 露國軍隊砲聲也 方今時今落來月 嬪宮殿下運命也)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순명황후께서 승하했는데 이때 장안에 위와 같은 동요가 나돌았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제국사의 한 단면이다.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화는 순명황후 민씨가 시어머니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사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얘기다.이것 또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본래 곤궁(坤宮=명성황후)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빈궁과 뜻이 맞지않아 서로 원수보듯 하였다.매일아침 저녁으로 빈궁이 대전과 곤궁께 문안인사를 드릴 때 원삼에 띠를 두르고 사배(四拜)를 올리셨다.

그때 순명황후는 문지방 밖에 서서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했다.간혹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 있거나 밤이 늦도록 서서 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은 형언할 수없는 일이었다.거기다 남편인 순종이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했으니 순명황후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했다.

무릇 음식과 남녀의 이성관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독숙공방(獨宿空房)하며 낙을 모르고 지내기를 20년이나 되었으니 그 쓰라린 고초를 무엇으로 다 형용하리.차라리 왕비가 되기보다 사가의 부인이 된 것만 못하지 않았는가.이리하여 1904년(甲辰 고종 41년) 10월 보름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승하하셨으니 향년 33세였다.

순명황후 민씨가 죽자 곧바로 계비 윤씨를 태자비로 봉했는데 윤택영(尹澤榮)의 12살난 딸이었다.그러나 동궁(순종)전하께서는 처음에 친영(親迎)을 마친 뒤로는 한번도 들르시지 않았으니 지난 날의 빈궁과 지내듯 담담하게 허송세월하게 되었다.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종은 고자”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정환덕은 순종이 고자가 아닌 이유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본래 국법에 따르면 동궁의 바지밑에는 소변보는 구멍이 있고 오줌눌 때는 가까이 있는 내시로 하여금 요강(溺器)을 바치게 하였다.그때 내시는 황공하옵게도 동궁의 성기를 엿보게 되고 요즘 소리로 양기가 발동하여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할수 있었다.또 털이 검고 무성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다.그런데 어찌 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혹시 성기가 미리 발동하는 조루증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땅히 동해야 할 때 동하지 않고 동하여서는 아니될 때 동했던 것(當動而不動 不當動而動)’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어찌 되었건 그 생리를 알 수 없다.대저 신하된 도리로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일인 줄 알면서 입을 연 것은 오로지 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이다.누가 감히 순종을 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명황후가 나이 설흔세살에 한 맺힌 일생을 마칠 때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그것은 서울의 사묘(四廟)에 큰 불이 난 것이었다.

당초 명성황후 생전시 북묘를 세우고 이어 광무 6년(1902년)에 동묘를 세워 서울에는 모두 동서남북 4묘가 있었다.그런데 1904년에 큰불이 일어났고 그때 장안의 시민들이 모두 달려들어 불을 껐던 것이다.그래서 안에 모셔 놓았던 신상(神像)은 무사히 불길을 피했는데 사당은 전소하고 말았다.

지금 동대문밖 숭인동에 사묘중의 하나인 동묘가 남아있다.이것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2년) 국난극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일종의 무묘(武廟)였다.성균관을 일명 ‘문묘(文廟)’라 했고,사묘는 외침을 막아주는 무신의 사당이었다.하필이면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순명황후가 돌아가신 1904년에 사묘가 불이 나고 덕수궁에도 불이 났는지,지금도 사람들은 일제가 저지른 방화로 믿고 있다.어찌 되었건 화재사건은 한많은 순명황후가 죽으면 일어난 사건이었고,그래서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이다.
1998-07-2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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