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00호/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창작과 비평 100호/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임영숙 기자 기자
입력 1998-05-21 00:00
수정 1998-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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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는 창작과 비평사를 자신의 학교로 꼽는다.“80년대 이후 일련의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나는 ‘창비’의 모든 책들을 통해 그 어려운(?) 역사·사회·문학적인 고민들을 해결해 나갔다.창비학교는 분명히 내 문학과 삶을 갈고 닦게 해준 학교였던 것이다.입학도 없고 졸업도 없는 영원한 학교 말이다”라고 김시인은 토로한 바 있다.

그 창비학교의 핵심인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여름호로 100호를 기록했다.통권 100호를 넘긴 잡지가 한둘이 아니지만 ‘창비’의 100호 기록은 남다른 뜻을 지닌다.

미국 유학을 마친 28세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백낙청씨가 이 잡지를 창간한 해는 1966년.정상적이었다면 25년만에 세울 100호 기록을 33년만에 이룬 것이다.‘창비’는 그만큼 힘든 길을 걸어 왔다.

리얼리즘 문학의 터전으로서 창작을 살찌우고 민족문학론과 민족경제론을 주도하며 비평 문화를 이끌어 온 ‘창비’는 암울한 시대 권력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그로 인해 80년 비상계엄하에서 출판사 등록 취소와 함께 폐간됐다가 6월 항쟁에 힘입어 88년 봄호부터 복간됐다.그 과정에서 발행인을 비롯,편집인·필자 등 많은 관련 인사들이 수사기관에 끌려가거나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역사가 “우리 현대사의 일부이자 살아 있는 민족문학의 교과서”라고 자부하고 있듯이 어두운 세월 자기 목소리를 꼿꼿하게 지킨 ‘창비’는 현실의 권력과는 다른 힘을 지니고 문단과 지식인 사회 일부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그래서 “창비야말로 하나의 정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70년대 활동한 젊은 문인들에게 ‘창비’가 ‘학교’역할을 한 것도 같은 이유다.

나중 이 잡지의 주요 필자가 된 소설가 이문구씨가 회상하는 창간 당시의 ‘창비’는 “그때만 해도 낯이 설 수밖에 없는 한글 전용의 가로짜기 조판인데다 논문은 길고 평론은 복잡하여 눈으로 읽으면 섞갈리고 머리로 읽으면 헷갈려서 쉽게 정이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130쪽 2천부로 시작한 잡지가 지금은 500쪽이 넘는 두툼한 모습에 국내 문예지로는 최고부수를 자랑,한때는 3만부를 넘기도 했다.‘창비’가 단순한 문예지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적 담론을 이끄는 종합지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여전히 ‘눈으로 읽으면 섞갈리고 머리로 읽으면 헷갈리는’ 논문들이 많이 실리고 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그 점을 외국의 고급 계간지 편집자들도 부러워한다.‘창비’가 계속 우리 지식인 사회의 중심에 있기를 기대한다.
1998-05-2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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