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강국화 성공… 고종은 자애롭기만”/공자를 정승으로 안연을 사부로 항우를 장수로 조조를 모사로 삼은들 유약한 임금이 국가중흥 이뤄낼까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1년에 안기영(安驥泳)의 쿠데타 음모사건이 있었다.안기영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8월21일 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에 과거 보러 올라온 유생들을 모아놓고 ‘타도 일본(伐倭)’을 부르짖으면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면 그들을 몰아 창덕궁을 기습,고종을 사로잡고 척신들을 잡아죽인다는 것이 쿠데타의 시나리오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가담했던 마음 약한 이풍래(李風來)라는 남한산성 소속의 한 장교가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수구(守舊)파의 불발 쿠데타였던데 반해 그 다음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반대로 개화파의 쿠데타였다.
“어느 해였던가.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 유길준(兪吉濬) 안경수 등의 무리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을 효빈(效嚬;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방함)하고자했으나 일본을 따를 수가 없었다.임금과 신하의 관계란 바람과 비의 사이 같은 것인데,일본의 메이지(明治)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갑신정변 개화파의 구데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군신간의 관계를 끊고 불세출의 공을 세우고자 했으니 이것은 마치 무거운 수레를 끈채 물을 건너고 배와 노를 움직여 저 험한 검각(劒閣;중국 사천성에 있는 대검산과 소검산 사이에 있는 구름다리)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하물며 서울에는 권력만 탐내는 권신(權臣)만 있고 충신(忠臣)은 지방에 숨어 있었으니 어찌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는가.이때문에 안경수는 이우인(李愚寅)의 손에 죽었고 김옥균은 홍종우(洪鍾宇)의 칼에 죽었다.그 밖의 여러 사람은 혹 살아서 고국에 돌아온 자도 있고 혹그 몸을 멸망시킨 자도 있었으니 다 기록할 수 없다.”
여기에 나오는 안경수는 1895년 을미사변때 항일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람이다.앞의 안기영의 수구 쿠데타와 같은 성격의 사건이었다.
어찌됐든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17일(음) 밤 서울 종로의 우정국 낙성식장에서 일어났다.2년 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이 계획없이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면 갑신정변은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洪英植) 서광범 박영효 등 이른바 갑신5역(甲申五逆)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이들은 홍영식이 우정국 총판(總辦)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우정국 낙성 축하연을 빙자,수구파 요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몰살하려 들었다.그러나 사전계획이 엉성한데다 소문까지 나버려서 우정국에서는 서재필이 민영익(閔泳翊)의 귀를 칼로 자른 것 외에 별 소득이 없었다.오기로 돼 있던 용산의 일본군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래서 김옥균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에 납치한 뒤 궁안에 들어오는 정부 요인을 차례로 찔러 죽였다.경우궁은 창덕궁의 옆문인 금호문 밖에 있던 작은 사당이었는데 지금은 없다.이때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이조연(李祖淵) 한규직 윤태준(尹泰駿) 등 보수파 6인방이 살생부에 올라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경우궁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20대 젊은이들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를 ‘남가몽’은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우연치 않게 우리 광무황제(고종)와 같은 해인 임자년(壬子年,철종 3년,1852)에 출생하였다.메이지는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신속히 따르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었다(從諫言如流 任賢使能).그러기에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이 나타나 영국식의 개화를 주창하고 유신정치 40년만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크게 변하여 노나라(魯國;여기서는 근대국가)가 되더니 마침내는 동양의 패주가 되어 세계에서 능히 당할 자가 없는 나라로 발전하였다.이것은 모두 일본이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미리 선각(先覺)한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다 알고 행한 뒤에야 깨달았으니 이는 만각(晩覺)한 것이다.그 때문에 우리 근대화는 마치 깨진 그릇을 끼어 맞추는 것과 같은꼴(破器相從)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구파개화파 세력다툼
이처럼우리나라 근대화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속에서 혼란만 거듭할뿐 되는 일이 없었다.거기다 외세까지 끼어 드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남쪽에 일본이 있고 북쪽에 러시아가 있어 서로 한국을 넘보고 있었으니 군주가 강하고 굳세어야 했다.그런데 고종은 유순하고 자애롭기만 했으니 요순(堯舜)시대가 아닌 이상 견뎌내기 어려웠다.
“성상(고종)은 타고난 자질이 어질고 착하며 자애로웠다.만약에 삼대(중국의 夏,殷,周)의 태평성대에 태어나셨더라면 덕이 있는 사람에게 그냥 정권을 이양할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그러나 이같이 조선 5백년이 끝나게 된 기구한 운명을 당하여 안으로는 어진 보좌관이 없고 밖으로는 훌륭한 장수가 없는데다 태평스러운 해가 오래 지속되어 우리나라는 미처 전비(戰備)를 갖추지 않았었다.하물며 강한 진나라(일본을 가리킴)가 동쪽에 있고 거센 초나라(러시아를 가리킴)가 북쪽에 있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니 비록 덕이 높은 요임금이 왼쪽에 계시고 순임금같은 훌륭한 신하가 오른쪽에 있더라도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기는 어려운 처지라 할 것이다.”
○“뛰어난 인물에 큰 일이…”
이런 임금에게는 훌륭한 재상과 장군이 꼭 필요하였다.그러나 김옥균같은 신하를 가지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없었다.‘남가몽’에 따르면 백이숙제(伯夷叔齊)나 조조(曹操)같은 신하가 나와도 구제불능이었다는 것이다.
“옛날 정치가 잘 다스려지던 한나라 문제(文帝)때같은 시대에도 오히려 회양(淮陽) 태수인 급암이 있었고 장사왕(長沙王) 태부인 가의(賈誼)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다.하물며 지금은 마침 액운을 당하여 비록 공자(孔子)로서 정승을 삼고 그 수제자인 안연(顔淵)으로 사부(師傅)를 삼고 자로(子路)로 집금오(執金吾;검사)를 삼고 백이로 서울의 판윤(시장)을 삼고 항우(項羽)로 상장군을 삼고 조조로 모사를 삼는다 하더라도 쉽게 중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먼저 뛰어난 인물이 있고,그러고 나서야 큰 일이 벌어지고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대략 이 세상에는 먼저 비상한 인물(非常人)이 나와야 다음에 비상한 일(非常之事)이 벌어지며,비상한 일이 벌어진 뒤에야 비상한 변화(非常之變)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남가몽’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그러나 왕이나 그 신하나 할 것 없이 모두 나라를 구하는데 역부족이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온전하였겠는가.<박성수 정문연 교수·한국사>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1년에 안기영(安驥泳)의 쿠데타 음모사건이 있었다.안기영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8월21일 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에 과거 보러 올라온 유생들을 모아놓고 ‘타도 일본(伐倭)’을 부르짖으면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면 그들을 몰아 창덕궁을 기습,고종을 사로잡고 척신들을 잡아죽인다는 것이 쿠데타의 시나리오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가담했던 마음 약한 이풍래(李風來)라는 남한산성 소속의 한 장교가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수구(守舊)파의 불발 쿠데타였던데 반해 그 다음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반대로 개화파의 쿠데타였다.
“어느 해였던가.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서광범(徐光範) 유길준(兪吉濬) 안경수 등의 무리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을 효빈(效嚬;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방함)하고자했으나 일본을 따를 수가 없었다.임금과 신하의 관계란 바람과 비의 사이 같은 것인데,일본의 메이지(明治)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갑신정변 개화파의 구데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군신간의 관계를 끊고 불세출의 공을 세우고자 했으니 이것은 마치 무거운 수레를 끈채 물을 건너고 배와 노를 움직여 저 험한 검각(劒閣;중국 사천성에 있는 대검산과 소검산 사이에 있는 구름다리)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하물며 서울에는 권력만 탐내는 권신(權臣)만 있고 충신(忠臣)은 지방에 숨어 있었으니 어찌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는가.이때문에 안경수는 이우인(李愚寅)의 손에 죽었고 김옥균은 홍종우(洪鍾宇)의 칼에 죽었다.그 밖의 여러 사람은 혹 살아서 고국에 돌아온 자도 있고 혹그 몸을 멸망시킨 자도 있었으니 다 기록할 수 없다.”
여기에 나오는 안경수는 1895년 을미사변때 항일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람이다.앞의 안기영의 수구 쿠데타와 같은 성격의 사건이었다.
어찌됐든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17일(음) 밤 서울 종로의 우정국 낙성식장에서 일어났다.2년 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이 계획없이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면 갑신정변은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洪英植) 서광범 박영효 등 이른바 갑신5역(甲申五逆)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이들은 홍영식이 우정국 총판(總辦)으로 있는 것을 기화로 우정국 낙성 축하연을 빙자,수구파 요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몰살하려 들었다.그러나 사전계획이 엉성한데다 소문까지 나버려서 우정국에서는 서재필이 민영익(閔泳翊)의 귀를 칼로 자른 것 외에 별 소득이 없었다.오기로 돼 있던 용산의 일본군도 움직이지 않았다.그래서 김옥균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가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에 납치한 뒤 궁안에 들어오는 정부 요인을 차례로 찔러 죽였다.경우궁은 창덕궁의 옆문인 금호문 밖에 있던 작은 사당이었는데 지금은 없다.이때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이조연(李祖淵) 한규직 윤태준(尹泰駿) 등 보수파 6인방이 살생부에 올라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경우궁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20대 젊은이들 때문에 나라가 얼마나 어렵게 되었는가를 ‘남가몽’은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우연치 않게 우리 광무황제(고종)와 같은 해인 임자년(壬子年,철종 3년,1852)에 출생하였다.메이지는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신속히 따르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었다(從諫言如流 任賢使能).그러기에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이 나타나 영국식의 개화를 주창하고 유신정치 40년만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크게 변하여 노나라(魯國;여기서는 근대국가)가 되더니 마침내는 동양의 패주가 되어 세계에서 능히 당할 자가 없는 나라로 발전하였다.이것은 모두 일본이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미리 선각(先覺)한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다 알고 행한 뒤에야 깨달았으니 이는 만각(晩覺)한 것이다.그 때문에 우리 근대화는 마치 깨진 그릇을 끼어 맞추는 것과 같은꼴(破器相從)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구파개화파 세력다툼
이처럼우리나라 근대화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속에서 혼란만 거듭할뿐 되는 일이 없었다.거기다 외세까지 끼어 드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남쪽에 일본이 있고 북쪽에 러시아가 있어 서로 한국을 넘보고 있었으니 군주가 강하고 굳세어야 했다.그런데 고종은 유순하고 자애롭기만 했으니 요순(堯舜)시대가 아닌 이상 견뎌내기 어려웠다.
“성상(고종)은 타고난 자질이 어질고 착하며 자애로웠다.만약에 삼대(중국의 夏,殷,周)의 태평성대에 태어나셨더라면 덕이 있는 사람에게 그냥 정권을 이양할 수도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그러나 이같이 조선 5백년이 끝나게 된 기구한 운명을 당하여 안으로는 어진 보좌관이 없고 밖으로는 훌륭한 장수가 없는데다 태평스러운 해가 오래 지속되어 우리나라는 미처 전비(戰備)를 갖추지 않았었다.하물며 강한 진나라(일본을 가리킴)가 동쪽에 있고 거센 초나라(러시아를 가리킴)가 북쪽에 있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니 비록 덕이 높은 요임금이 왼쪽에 계시고 순임금같은 훌륭한 신하가 오른쪽에 있더라도 독자적으로 정치를 하기는 어려운 처지라 할 것이다.”
○“뛰어난 인물에 큰 일이…”
이런 임금에게는 훌륭한 재상과 장군이 꼭 필요하였다.그러나 김옥균같은 신하를 가지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없었다.‘남가몽’에 따르면 백이숙제(伯夷叔齊)나 조조(曹操)같은 신하가 나와도 구제불능이었다는 것이다.
“옛날 정치가 잘 다스려지던 한나라 문제(文帝)때같은 시대에도 오히려 회양(淮陽) 태수인 급암이 있었고 장사왕(長沙王) 태부인 가의(賈誼)같은 어진 신하가 있었다.하물며 지금은 마침 액운을 당하여 비록 공자(孔子)로서 정승을 삼고 그 수제자인 안연(顔淵)으로 사부(師傅)를 삼고 자로(子路)로 집금오(執金吾;검사)를 삼고 백이로 서울의 판윤(시장)을 삼고 항우(項羽)로 상장군을 삼고 조조로 모사를 삼는다 하더라도 쉽게 중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먼저 뛰어난 인물이 있고,그러고 나서야 큰 일이 벌어지고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대략 이 세상에는 먼저 비상한 인물(非常人)이 나와야 다음에 비상한 일(非常之事)이 벌어지며,비상한 일이 벌어진 뒤에야 비상한 변화(非常之變)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남가몽’ 서두에 나오는 말이다.그러나 왕이나 그 신하나 할 것 없이 모두 나라를 구하는데 역부족이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고 온전하였겠는가.<박성수 정문연 교수·한국사>
1998-03-2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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