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풍악 탐닉 왕비… 배곯은 오영군 궐기(비록 남가몽:3)

임오군란/풍악 탐닉 왕비… 배곯은 오영군 궐기(비록 남가몽:3)

입력 1998-03-11 00:00
수정 1998-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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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기생들 매일 궁중에 불러 가무/하늘도 노하여 가뭄에 화적떼 들끓어/백성들은 곤궁하고 국고는 탕진되니/녹봉 밀린 5천여 구식군은 마침내…

고종과 대원군,그리고 민비(뒤의 명성황후).이 세 사람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다.

한국 근대사의 주제는 망국이다.아무리 그 과정이 좋았다 하더라도결과가 망국이었다면 그 역사는 망국사가 되는 것이다.따라서 이 세인물이 얼마나 나라 망치는데 기여하였느냐 하는 혹독한 역사의 책임문제가 당연히 뒤따르게 된다.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게 되겠지만 역사의 책임이란 것은 한 두 사람이 질 문제가 아니다.그렇다고 당대의 모든 국민이 질 문제도 아니다.따라서 특정 다수인이 책임자로 비판받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다.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처가 쪽에서 조심스럽게 며느리감으로 고른 규수였으나 불과 7년만에 이 규수에게 시아버지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두고 두고 후세의 교훈이 되고 있다.

○16세때 왕비 간택돼 입궐

민비는 고종보다 한 살 연상인 1851년생이다.나이는 비록 한 살 위였지만 그 머리와 책략은 10년쯤 위였다.민비의 외모에 대해서는 미인이다,아니다 하는 양론이 있지만 아직 확인할 길은 없다.민비가 왕비로 간택되어 입궐한 것이 1866년 나이 16세때 일이었는데,원자를 낳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다.1874년에 가서 겨우 순종을 낳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그때 빈궁 이씨가 먼저 낳은 왕자가 이미 일곱살이나 되었으니 민비로서는 얼마나 조마조마하였는지 일각이 여삼추였다.

그러나 민비에게 있어 원자의 탄생보다 더한 일은 1874년(갑술) 거의 때를 같이하여 대원군을 대궐에서 몰아낸 일이었다.권불십년이라 했듯이 흥선대원군은 집권한지 꼭 10년만에 하야했고 그 뒤에는 민비가 대원군을 대신하여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20년간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민비에 대해서는 허다한 일화가 남아 있으나 풍악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남가몽’ 이외에 그리 많지 않다.요즘말로 민비는 노래방을 좋아했던 것이다.

“상감(고종)이 갑자년(1864)에 즉위한 뒤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 19년동안곤궁(민비)은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시어 배우들을 궁중에 데려다가 노래 부르게 하고 기생들로 하여금 묘기를 부리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그러니 그 상으로 하사한 금품이 수를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이 때문에 백성은 극도로 곤궁해지고 국고는 탕진되어 바닥이 드러났다.그러나 배우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었고 군인들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궁중에서는 비록 태평세월이라 할 수 있었겠으나 민간은 만신창이가 된 빈사의 세상이었다.이 때를 당하여 ‘하늘의 경고(천경)’가 여러번 나타나고 인심이 흩어졌으니 무슨 변란인들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몹시 가물어 논의 벼가 말라죽고 고을마다 화적떼가 들끓었다.그래서 이것을 천경,즉 하늘의 경고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하루는 고삐 풀린 말이 궁궐 안에 뛰어드는 불길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하필이면 이런 때 섣부른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고,구식군대는 5영에서 2영으로 감축하였으니 정리해고당한 구식군대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더욱이 봉급을 여덟달치나 지급하지 않았으니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그것도 모르고 민비는 배우와 가수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연일 풍악을 즐기고 있었다.

○고삐 풀린 말이 궁궐로

“한 마리 개가 짖으면 두 마리 개가 따라 짖는 법이고 일시에 짖어대면 천백마리가 떼를 지어 짖어대는 법이다.한 사람의 군졸이 주동하여 일어나면 두 사람의 군졸이 제창하여 일어나고 일시에 제창하고 일어나면 5천명의 군졸이 호응하여 일어나게 된다.원래 5영의 군인수는 5천772명이었다.이와 같은 다수의 군중이 들고 일어나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군료를 여러달 지급받지 못한 군사들의 분통과 원망이 쌓여 동심동력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나니 고함지르는 소리와 하나로 합친 형세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고 비가 거꾸로 쏟아 퍼부어지는 듯했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지는 것과도 같았다.”

민비가 음악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매천야록’에도 약간 언급되어 나오니 사실인 것 같고 군인들이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곤궁을 내놓으라고 소리질렀으니 임오군란의 책임 소재가 민비와 민씨 일족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임오군란이 일어난 원인중의 하나로 민비의 유흥 취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병사들이 먼저 선혜청에 들어가 불을 지르니 이때 선혜청의 당상관인 김보현은 당번을 서다가 변을 당했다.탄환이 비오듯 쏟아져서 불길이 하늘을 찌르는데,가련한 김보현은 별안간 이 급작스런 난을 당하여 달아날 곳을 알지 못하고 동분서주,정신을 잃더니 마침내 화염 속에서 타죽었다.아! 슬프도다.어찌 일찍이 기미를 알아차려 퇴청하지 않았는가.이 또한 그칠 곳을 알지 못하여 최선을 다하다가 그런 것이라 하겠다.병사들은 또한 성 안과 밖을 막론하고 권세있는 집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불지르고 총을 쏘았다.그러면서 궁궐 안을 향해 달려들었으니 천지가 솥끓듯 하고 강산이 우뢰소리로 진동하였다.”

○8척 장신 등에 업혀 탈출

사실 김보현의 죽음은 이보다 더 비참하였다.김보현이 병사에게 잡혀 계단 아래 넘어졌을 때,병사들이 창으로 김보현의 입을 찔렀다.그러자 김보현은 이를악물고 창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병사는 당초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창을 빼려 했는데 김보현이 끝까지 창끝을 문채 놓아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찔러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곤궁께서는 크게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어찌해야 할지 알지를 못했다.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대궐을 빠져나와 어두컴컴한 마을로 달아났다.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 어찌할 수 없는 이 때에 어디선지 8척 장신의 사나이가 홀연 나타나더니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사오니 황송하오나 빨리 저의 등에 업히소서’ 하고 두번 세번 독촉하였다.경황이 없는지라 누구인지도 모르고 곤궁이 사나이의 등에 업혀 수구문 밖으로 나갔다.이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었다.가까스로 가마 한 대를 불러와서 타고 숭례문을 빠져나가 곧바로 남태령 고개를 향해 한강가로 나갔다.”

이 사건은 민비가 첫번째 당하는 변란이었고 그 뒤 10여년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박성수 정문연 교수·한국사>
1998-03-1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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