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는 역사 바깥의 사물이 아니다.반드시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문화유산에서 역사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그것은 문화재라기 보다는 골동이나 자질구레한 물건 박물세고에 지나지 않는다.그래서 문화유산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문화와 역사는 맞물려 있다.생활공동체안에서 여러 행동양식이 일정한 정형의 틀을 이루어 낸 것이 문화다.또 역사는 문화를 바탕에 깔고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흔적이어서,문화와 역사는 서로 떼어놓을수 없는 상호보완의 관계인 것이다.문화활동의 소산인 문화재에서 역사를 보아야하는 까닭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문화·역사 상호보완 관계
우리는 그동안 문화재에 얼마만큼 역사성을 던져주었는가.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최근 중국 고고학자 원위청(온옥성)이 「백제금동대향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글(서울신문 2월18일자 1·14면 보도)을 보면 더욱 그렇다.그는 금동향로에서 우리보다 더 정확히 백제역사를 읽었다.중국의 고고학전문 주간지 「중국문물보」에 실은 글에서 향로를 요지부동의 백제유물로 못박았던 것이다.
그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향로를 발굴할 당시 붙인 이름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향로에 나온 날짐승은 백제의 세미계를 천계로 표현한 것이고,산은 백제건국 터전 금마산이라는 것이다.또 다른 형상 모두가 백제의 자연인 동시에 백제인이라는 주장도 곁들였다.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서 여러 책에 나오는 백제 이야기를 향로에서 다 끄집어 냈다.
그러면서 향로 이름을 지극히 백제적인 「금동천계금마산제대향로」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놓았다.원위청의 논리는 정연하거니와,대단한 설득력을 지녔다.국내 학자들의 반론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금동향로라는 유물에다 역사적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었다.그래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더욱 윤택한 문화유산으로 다가왔다.영원한 세기적 보물이 국보의 위치를 확고히 굳힌 것이다.
국내 학자들은 향로의 시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중국을 너무 의식했다.그러나 원위청은 문제의 글에서 「중국에는 봉래산을 상징한 박산향로가 있을 뿐,백제금동대향로 처럼 생긴 정교한 유물은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그럴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다.동아시아 문화전파 루트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해도,이식과정에 변하고 발전했다.
역사란 말 히스토리(history)의 본래 뜻은 탐구라고 한다.그러고 보면 우리 자신은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탐구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영국의 사학자 L B 내미어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니면 내용이 보이는 미세한 부분」이란 그의 말은 사뭇 교훈적이다.우리는 금동향로에서 윤곽도,미세한 부분의 내용도 제대로 못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미세한 부분까지 탐사를
그 책임은 우선 발굴을 담당하고 유물을 관리했던 고고학분야 종사자들에게 있다.우리나라 고고학계는 그동안 유물 자체에만 매달려 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오류나 저지르지 않았는지….유물만을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기술의 고고학」을 어느 정도는 경계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기술의 고고학」도 고고학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너무 기울다 보면 고고학이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가 홀로 서서 문화유적을 발굴한지도 반세기가 넘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경주의 신라고분 호우총을 시작으로 50년동안 1천300여건의 유적을 발굴했다.지금 이 시간에도 경남 진주 남강댐 상류 등 여러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역사를 생각할 줄 아는 고고학자가 아닌,단순한 발굴기술자 손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없는지 궁금하다.
그러니까 문화와 역사는 맞물려 있다.생활공동체안에서 여러 행동양식이 일정한 정형의 틀을 이루어 낸 것이 문화다.또 역사는 문화를 바탕에 깔고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흔적이어서,문화와 역사는 서로 떼어놓을수 없는 상호보완의 관계인 것이다.문화활동의 소산인 문화재에서 역사를 보아야하는 까닭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문화·역사 상호보완 관계
우리는 그동안 문화재에 얼마만큼 역사성을 던져주었는가.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최근 중국 고고학자 원위청(온옥성)이 「백제금동대향로」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글(서울신문 2월18일자 1·14면 보도)을 보면 더욱 그렇다.그는 금동향로에서 우리보다 더 정확히 백제역사를 읽었다.중국의 고고학전문 주간지 「중국문물보」에 실은 글에서 향로를 요지부동의 백제유물로 못박았던 것이다.
그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향로를 발굴할 당시 붙인 이름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향로에 나온 날짐승은 백제의 세미계를 천계로 표현한 것이고,산은 백제건국 터전 금마산이라는 것이다.또 다른 형상 모두가 백제의 자연인 동시에 백제인이라는 주장도 곁들였다.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서 여러 책에 나오는 백제 이야기를 향로에서 다 끄집어 냈다.
그러면서 향로 이름을 지극히 백제적인 「금동천계금마산제대향로」로 바꾸자는 의견을 내놓았다.원위청의 논리는 정연하거니와,대단한 설득력을 지녔다.국내 학자들의 반론이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금동향로라는 유물에다 역사적 생명력을 다시 불어넣었다.그래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더욱 윤택한 문화유산으로 다가왔다.영원한 세기적 보물이 국보의 위치를 확고히 굳힌 것이다.
국내 학자들은 향로의 시원에만 집착한 나머지 중국을 너무 의식했다.그러나 원위청은 문제의 글에서 「중국에는 봉래산을 상징한 박산향로가 있을 뿐,백제금동대향로 처럼 생긴 정교한 유물은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그럴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다.동아시아 문화전파 루트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졌다 해도,이식과정에 변하고 발전했다.
역사란 말 히스토리(history)의 본래 뜻은 탐구라고 한다.그러고 보면 우리 자신은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탐구가 부족했는지도 모른다.영국의 사학자 L B 내미어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윤곽이 아니면 내용이 보이는 미세한 부분」이란 그의 말은 사뭇 교훈적이다.우리는 금동향로에서 윤곽도,미세한 부분의 내용도 제대로 못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미세한 부분까지 탐사를
그 책임은 우선 발굴을 담당하고 유물을 관리했던 고고학분야 종사자들에게 있다.우리나라 고고학계는 그동안 유물 자체에만 매달려 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오류나 저지르지 않았는지….유물만을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기술의 고고학」을 어느 정도는 경계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기술의 고고학」도 고고학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너무 기울다 보면 고고학이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가 홀로 서서 문화유적을 발굴한지도 반세기가 넘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경주의 신라고분 호우총을 시작으로 50년동안 1천300여건의 유적을 발굴했다.지금 이 시간에도 경남 진주 남강댐 상류 등 여러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역사를 생각할 줄 아는 고고학자가 아닌,단순한 발굴기술자 손으로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없는지 궁금하다.
1997-02-23 1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