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의 계약/김기수 가 메모리얼대 교수(굄돌)

「줄서기」의 계약/김기수 가 메모리얼대 교수(굄돌)

김기수 기자 기자
입력 1996-10-23 00:00
수정 1996-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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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 입국절차를 밟을때 본 일이다.스물남짓한 젊은 여자손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심사관한테 물었다.『저 뒤에 가서 다시 서란 말예요』 손에 입국허가신청서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뭔가 기재사항이 미비해서 퇴짜를 맞은 것이 분명했다.심사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여자손님은 한두번 항의하다가 체념하고 물러났다.

입국허가는 완비한 서류를 들고 온 사람한테만 준다.그런데 완비한 서류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은 많다.그러니 어쩌겠나,먼저 서류를 완비하고 그 다음 줄을 서든 어쩌든 다시 심사관 앞에 서야지.심사관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지 싶다.그러나 이런 생각은 애당초 줄이 없든지 있더라도 무질서한 것일 때만 옳다.서류를 완비해왔을때 사정급한 다른 손님이 그 여자손님의 먼저 온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출입국관리당국은 손님을 줄서게 했다.내국인은 어디에,그리고 외국인은 어디에 서라는 표지를 달아놓았다.그리고 줄서지 않고 심사관한테 가는 길을 봉쇄해 놓았다.이런 경우 과연 그 여자손님이 다시 줄서야 할지 아닐지는 「줄세운 자」의 목적에 비춰서 판단해야 한다.그 목적은 선착순처리의 원칙에 따라 누가 먼저 오고 누가 나중에 왔는지를 가리자는 것이다.수백명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이것을 정하기 어려울 테니까.이렇게 볼때 그 여자손님이 줄서기를 다시 할 이유는 없다.적어도 그에 관한 한 선착후착은 이미 결정났기 때문이다.입국심사관은 그를 부당히 처벌한 것이다.

줄의 목적을 잊은 것은 줄서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앞손님이 시간끌면 으레 볼멘소리를 한다.앞사람이 공중전화를 오래 쓴다고 화낸 일이 있는 분은 잘 알 것이다.그러나 줄서는 목적은 앞손님 일이 끝나면 자기용무를 보겠다는 것일 뿐이다.뒷손님이 앞손님의 일을 놓고 처리가 늦다고 불평하거나 빨리 끝내라고 재촉할 권리는 없다.

일단 줄을 섰으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또 줄을 세웠으면 그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줄이라는 계약에서는 권리가 의무의 완성을 뒤따른다.

1996-10-2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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