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씨 선고공판」 작가 방청기/조성기 소설가

「전·노씨 선고공판」 작가 방청기/조성기 소설가

조성기 기자 기자
입력 1996-08-27 00:00
수정 1996-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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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엄한 역사심판… 그리고 새출발

26일 서울지법 제417호 대법정 판사석 왼편에 하늘을 뜻하는 건과 땅을 뜻하는 곤만을 살짝 내보이며 축 늘어진 듯 걸려있는 태극기가 오늘따라 우리 역사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 고통을 참지못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피고인들의 정면촬영이 잠시 허용되어 카메라맨들이 판사석 바로 앞에서 긴장된 자세로 대기하고 있다.작가 밀란 푼데라가 「느림」이라는 작품에서 말한 대목이 생각난다.현대인들의 삶은 카메라 앞에서 조건지어진다고 했던가.오늘 카메라가 펼쳐 보일 영상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현장이 아닐 수 없다.

「피고인 전두환」재판장의 피고인 호출은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심판장의 음성처럼 엄숙하여 일순 대법정은 폭풍 전야의 고요,아니 심판전야의 고요에 싸인다.피고인들이 차례로 호명되어 피고인석에 앉는다.한때 우리 역사를 쥐고 흔들었던 거물급들이다.그 피고인들 바로 위에 달려 있는 법정의 샹들리에는 피고인들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가리키는 거대한 손가락처럼 여겨진다.

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교만한 왕 벳사살의 연회석상에 거대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그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다.「메네」는 너의 왕국이 끝났다는 뜻이요,「데겔」은 저울에 달아보니 형편이 없었다는 뜻이다.오늘은 권세가 끝난 자들을 저울에 달아 그 무게를 재어보는 날이다.지금까지의 재판과정에 비추어보아 그들은 대부분 「데겔」이 될 가능성이 많다.

재판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가는 동안 방청석 중간쯤에 하얀 상복 차림을 하고 있는 5·18 유족 대표들이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연신 손으로 머리를 주무르다 말고 아예 앞좌석 등받이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버린다.속으로 오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피고인들의 머리속에도 12·12와 5·17과 관련된 영상들이 어지럽게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얼마나 서로 대비되는 영상들인가.

재판장은 피고인들과 변호인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 주장을 논파하고 있다.「이러이러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받아들일 수 없다」「받아들일 수 없다」똑같은 끝문장이 수도없이 반복되고 있다.그동안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상황들을 숙명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재판장의 목소리가 약해지는 듯하다가 「처단」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는 섬뜩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분명해진다.「표면적으로는 이러이러하나 실질적으로는 이러이러하다」이런 문장들도 자주 사용된다.표면적인 역사의 동토를 정의의 삽으로 깊이 파서 실체적인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문구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양형이유를 밝힙니다」법정은 새롭게 긴장되고 재판장의 어조는 더욱 엄숙해지고 카랑카랑해진다.방청석에서 잠깐씩 졸던 사람들도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번뜩 눈을 뜬다.「이루 말할 수 없이 좋지 못한」전두환 피고인의 죄들을 촌철살인으로 요약해서 열거해 나가는 재판장의 목소리에는 판사석의 태극기가 웅크린 자세로 끌어안고 있는 역사의 아픔과 좌절,비통들이 스며있다.나 자신에게 떨어지는 선고문인 양 눈을 감고 듣고 있는 필자의 두 눈에 저마음 깊속한 곳에서 비어져나오는 눈물이 고여든다.5·18유족 대표들은 용케도 오열을 참아내고 있다.전두환 피고인을 처단하니 마음이 후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우리 모두 가슴을 치고 통곡해야 마땅하다.

「피고인들을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법정은 또 한번 술렁인다.방청객들의 어깨가 일제히 앞으로 쏠린다.「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드디어 한쪽 저울이 형편없이 확 기울어지고 만다.그 저울에 얹혀 있던 초라한 몇개의 추들마저 와락 미끄러져 곤두박질치고 만다.하늘의 손가락을 대변한 역사의 손가락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데겔」이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음각해놓았다.

우리는 모두 이 「데겔」이라는 선고앞에 서야 한다.개인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새로운 인생과 역사의 출발점에 서야 한다.그리고 정직하게 달려나가야 한다.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법정이 카메라 앞에 공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재판이 모두 끝나 판사들이 퇴정하자 그동안 오열을 참고 있던 5·18 유족들이 피고인의 이름을 외쳐대며 「내 아들 내놓아라!」부르짖는다.그 어떤 역사적인재판도 그 어떤 선고도 그들의 가슴에 묻혀 있는 혈육을 이장해갈 수는 없다.
1996-08-27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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