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모헨조다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5)

파키스탄/모헨조다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5)

황규호 기자 기자
입력 1996-08-12 00:00
수정 1996-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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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500년에 세운 완벽한 계획도시/벽돌 8천만장 소요 추산… “인더스문명의 꽃”/대욕탕에 상·하수시설… 도로는 벽돌포장/기능별로 구역 배치… 요새유적이 중추

인더스문명의 꽃 모헨조다로.파키스탄 신드지방 라르카나에 있다.카라치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신크리를 우회하여 2시간만에 모헨조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황토지대에는 벌써 불볕이 깔렸다.그래서 메마른 문명의 구릉모헨조다로는 말 그대로 「죽음의 언덕」처럼 보였다.

비행장에서 4∼5㎞쯤은 될까.그리 멀지 않았다.모헨조다로 초입의 요새유적은 약간 경사진 비탈에 흙을 돋우어 만든 인공언덕 기슭을 깔고 앉았다.작열하는 불볕을 이기지 못하고 고운가루로 바스러진 황토흙과 벽돌이 어울린 모헨조다로의 색깔은 붉었다.인더스강이 범람하면서 밀어붙인 황토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모헨조다로는 애초부터도 붉은색 도시였다.

그 요새유적 어귀에 모질게 자란 가시나무 한그루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신드말로 간디라는 가시나무는 그런대로 불볕을 가려주었으나,유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곧 시작되었다.높이 21m에 지나지 않는 인공언덕의 벽돌계단이 극악스러운 더위로 해서 코밑으로 바싹 다가왔다.그리고 정상에 올라 진흙과 벽돌을 섞어 만든 거대한 탑파(수투파)를 만났다.

요새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기 딱 알맞았다.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D배너지도 모헨조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으니까….실제 AD 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한 점을 발굴해냈다.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그러니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어떻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를 붙였다.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요새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다.인공의 언덕,다시 말하면 토루가 있기때문에 요새로 불리는 이 유적은 도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정상에 올라서면 동남과 동북쪽으로 펼쳐진 주변 도시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새유적(SD구역)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중요한 건물은 큰 욕조가 있는 대욕탕이다.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치되었다.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가 완벽했다.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내는 배수 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대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방들이 따로 있다.깨끗한 물을 늘상 공급받아 몸을 청결하게 가꾼 성직자들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대욕조를 돌아보고 나서 눈길을 끄는 건물터 하나가 골목 건너에서 기다렸다.네 개의 통로가 난 건물안에는 벽돌 스무남은장씩을 포개 쌓은 주춧대가 늘어 섰다.그 주춧대는 지붕 버팀기둥 자리였을 법한데,건물안 홀 넓이는 26㎡를 헤아렸다.고고학자나 문명사에 관심을 둔 전문가들은 이 건물을 종교집회를 위한 성소로 보았다.이 성소건물은 모헨조다로의 다른 블록 DK지역에서 발굴한 족장의 저택과 함께 도시사회의 통치기능과 체제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기도 했다.

모헨조다로를 와서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위대한 도시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그까짓 벽돌을 쌓아 건설한 도시가 별 대수로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BC 2500년쯤 도시계획에 의한 완벽한 도시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모헨조다로 사람들 말고 다른 많은 종족들은 기껏해야 움집 정도를 짓고 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요새유적(SD구역)과 그 밑의 도시유적 DK구역,노동자 거주유적 HR구역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방수처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너비가 10m에 이르는 큰 도로에는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벽돌을 모로 뉘어 깔았다.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고고학자들이 계산해낸 숫자는 자그마치 8천만장이다.벽돌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세 종류가 생산되었다.가장 큰 세로 28㎝,가로 16㎝,두께 9㎝짜리 벽돌은 나무로 구웠다.나머지 작은 규격품 벽돌을 굽는 데는 곡물의 껍데기 왕겨를 땔감으로 썼다.이들 벽돌은 건축용도에 따라 사용되었다.오늘날 건축자재용 벽돌강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나 벽돌공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헨조다로와 버금하는 파키스탄의 다른 문명유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모헨조다로보다 더 상류에 위치한 인더스강 지류 라비강 북쪽 연안의 하라파 유적의 수난이 그것이다.영국식민통치시대 파키스탄 초기철도건설 당시 하라파유적의 벽돌이 공사용 자재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다.그 이후 문명유적임이 확인되어 지금은 모헨조다로 유적과 더불어 두 개의 큰 인더스문명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정오를 넘긴 구릉지대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그러나 내친 걸음이라 모헨조다로박물관에서 내준 랜드로버로 인더스강쪽을 향해 달렸다.2㎞쯤을 실히 가서 강물이 범람할 때 도시 한 블록을 흔적없이 삼켜버린 폐허지대에 다달았다.비록 폐허라 할지라도 모헨조다로를 보다 분명한 문명유적으로 부각시킨 많은 유물들이 1898∼99년 사이 여기서 출토되었다.파키스탄 독립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여러 돌인장,소가 끄는 달구지 따위의 테라코타 조각품들,무늬도자기와 민무늬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소 달구지에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의 그 넓은 길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감했다.그리고 돌인장에는 설형문자가 나오거니와 큰 선박 그림을 새겼다.이들 모헨조다로의 인장은 파키스탄보다 먼 서역수메르에서도 출토되었다.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아주 일찍 고유문자를 쓰는 가운데 큰 배를 부려 장거리 해상무역로를 개척했다는 증거가 아닌가.그래서 모헨조다로에는 영원한 문명의 빛이 어려있는 것이다.<라르카나=황규호 특파원>
1996-08-1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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