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절/대약진 운동·문혁때 갖은 고초(두만강 7백리:4)

고난의 시절/대약진 운동·문혁때 갖은 고초(두만강 7백리:4)

김윤찬 기자 기자
입력 1995-03-17 00:00
수정 1995-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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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대약진/조선족 농토 모두 국유화… 군사훈련 시켜/1966년 문혁/5만여 동포 간첩·반혁명분자 몰아 고문

고난의 시대와 오늘 요즘 연변의 향진 일선 간부들은 저녁이면 술에 곤죽이 되어 돌아온다.그리고는 아침에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출근하기가 일쑤여서 위와 간을 버렸다고 한다.그 이유는 상부에서 지시는 내려오고 농민들은 치받아 중간에서 농민들을 달래느라 술을 마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간부질(노릇)하려면 술재간을 키워야한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이 모두 세월 탓이다.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간부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화룡시 남평진 유신촌에 사는 유택모(68)노인은 요새 간부들을 미더워 하면서 개혁개방의 시대에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개혁시대 보람 느끼며

『간부들도 우리네 사정을 알고 위에는 슬슬 거짓말도 하는것 같습데다.우리에게 이롭게 하자는 거디요.고생 끝에 낙이라고 좋은 세월이야요.그리고 등소평 동지는 정말로 감사한 분이십네다.개혁개방을 하니 얼마나 좋습네까.문화혁명 때에 가을을 해도 두달씩 했고 온 하루 뼈 빠지게 일 해도 5전(벼 한근이 9전이였다)수입이였디요.보리고개를 넘기 바쁘게 식량이 떨어지고….도거리(땅을 개인한테 나누어 줌을 이르는 말)를 하니 일년내내 하던 일도 세네달이면 되고 산량이 많이 나고 정말 옛날 지주보다도 훨씬 잘살게 됐디뭡네까.농한기면 버섯이며 약재들을 캐서 팔아 목돈을 쥐기도 하디요.작년에 송이를 따서 열흘 사이에 큰 돈을 벌었다구요.문화혁명땐 자본주의 복벽을 방지한다고 버섯은 고사하고 닭알 한알 팔지 못하게 했으니 원…』

그러나 불모지를 가꾸어 먹고 살만하게 된 조선족 들에게 지난날 불행은 크게 두번 찾아왔다.중국의 조선족들이 못자리판을 이룬 연변에서 「대약진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57년이다.이 때에 간부들은 요즘과 같은 선의의 거짓말이 아닌 진짜 거짓말을 식은죽 떠 먹듯 내뱉았다.모든 개인의 재산을 국유화하면서 3년안에 영국을 따라잡는 다고 말대포를 펑펑 쏘아댔다.그 거짓말을 참말로 알아들은 연변 사람들은 몇년 후 차를 사게 되면누가 운전을 할 것이냐를 너나 없이 걱정할 정도였다.꿈도 참 야무졌다.

대약진 운동에 따라 향을 인민공사,촌을 대대,자연부락을 소대로 조직했다.또 농민군사화를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온 마을이 집체식당에서 끼니를 꾸렸다.당시 생활은 집체화여서 먹는 것은 물론 잠자리 까지도 합숙화를 시도했다.농기구의 기계화 명목으로 손수레 바퀴축에 마구잡이로 베어링을 넣었다.제대로 굴러갈 턱이 없었는데,약진운동은 마치 그 손수레 같은 것이었다.

화룡시 덕화진 천중백(65)노인이 회고하는 당시 연변 농촌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수운 꼴이 많다.그러나 어디 웃음인들 웃을 여력이 있었겠는가….하여튼 그 절박했던 어려운 시절의 사연을 귀담아 들어 보았다.

『하루 진종일 일을 하고도 밤이 이슥해야 잠을 잤디요.밤에는 학습과 논쟁(토론)을 하라고 기래요.눈을 비비면 새벽부터 군사훈련을 시켰댔는데,농촌사람들이 제대로 할리 만무 아닙네까.아 글쎄 「우로 돌앗」하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만 위켠으로 돌아 두만강을 향합데다.훈련 받는데서 보면 위켠에 두만강이 있었댓시요.기리니끼리 농사일도 안되고….해봤자 내 일이 아니니까 건성건성이었디요.그런데 명령은 주살나게 떨어져 정신차릴 틈도 없습디다』

○“3년내 영추월”외쳐

대약진 운동은 허상에 불과했다.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위에서 농사땅 깊이갈이(심경)를 명령하면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을 그대로 둔채 흙을 덮어버렸다.그리고 나서 다음해 씨앗을 뿌리면 곡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땅속에 썩지도 않은 콩대 등이 그대로 깔려있으니 흙이 들떠 곡식이 자랄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보고는 늘 전량 완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다.깊이갈이를 해서 1㏊당 36만근의 수확은 거뜬할 것이라는 맞장구였다.36만근이 수확기에 가서는 결국 1만근도 안되게 줄지만,콩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고 실어가버렸다.먹을 양식이 남지 않았다.그래서 이삭이라도 주워올까 하면,또 명령이 떨어졌다.발갈이요,추비요 하고 다그쳐 제것이라고는 곡식 한톨 가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66년 5월부터 대륙을 휩쓸어 버린 이른바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을 뺨쳤다.연변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간첩,우파,지주,부농,나쁜 분자,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반동적 지식분자 등의 혐의로 투쟁을 받은 사람은 무려 5만여명이었다.간부,인테리는 모두 투쟁 대상이었다.외국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거나 편지거래가 있었다면 간첩이고 심지어는 말 한마디 잘못해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용정시 삼합진 북흥의 한인수는 사람들이 목에다가 충(모택동한테 충성한다는 뜻으로 심장을 상징하는 복숭아형 빨간 판에 충자를 쓴 패쪽)자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고 『병아리 잡아 먹는 개처럼 패쪽은 왜 메고 다니는가』라고 해서 반년동안 투쟁을 당했다.그리고 한 무식한 할머니는 모택동의 어록「최저한도의 지식분자」를 「쇠좃 한동이」로 잘못 알고 외우다 1년동안을 욕보았다.한어를 모르는 송석봉은 모두들 한어로 구호를 부르는데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엉겁결에 『나두…』하고 한마디 외쳤다가 한달동안 끌려다녔다.송석봉의 별명은 지금도「나두」다.

투쟁수단의 가혹정도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매는 약과,납을 녹여서 먹이고 쇠를 달구어 물리고 널판에 못을 박고 그 위로 걷게하고 온돌방에 가두어놓고 물 한모금 안주고 불을 때서 데우는 등의 고금 고문수단이 총동원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 속출

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조창선은 불찜질을 당한 그날 밤 두만강 건너 벼랑밑에 가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시체가 발견되었는데도 죽은 사람의 허리띠가 조선 상표가 붙은 것이라는 것을 트집잡아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못가져 오게 했다.결국 조선에 사는 친척들이 매장을 했다.지금도 묘는 강 건너에 있다.

문혁 당시 주도권을 잡고 사람잡이에 날뛴 사람은 대개 일자무식의 농민,노동자,군인이었다.그들은 노농병선전대라는 이름으로 농촌과 도시의 공장과 직장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의 무지의 실례가 하나 있다.당시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어화하였는데 조선말도 한어를 기준으로 고쳤다.연변인민출판사로 들어온 노동자선전대는 조선말 고유어를 한어로 고치는데 요일도 한어화 하여 성기로 고칠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일이 성기로 되면 월요일은 성기일,화요일은 성기이,일요일(성기일)은 또 월요일과 똑같은 성기일이 될것인데 어떻게 가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걸려 결국 포기되었다.만약 이런 걸림돌이 없었더라면 문화혁명 10년동안의 3천6백55일은 모두 성기로 변했을 것이다.<사진 김윤찬 기자>
1995-03-1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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