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 아홉번 돌린끝에 담당자와 통화
북경에서 특파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크게 당황했던 일로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은 인감도장을 파러 갔을때 당한 일이다.외국특파원이 전화를 신청하자면 「○○신문 북경지국」과 같은 인감도장을 파야하는데 그 절차가 꽤 까다롭다.우선 중국외교부로부터 서신을 받아 공안부 외국인관리처에 가서 신고를 한후 여기서 지정해준 도장집에서 파야 한다.
기자도 서신을 들고 북경시 천안문 뒤쪽 ㅁ자로 된 단층 기와집에 자리잡고 있는 공안부 외국인관리처를 찾아 갔다.옛날 한국 농촌의 낡은 면사무소를 연상케하는 이 관리처에는 외국인들의 출입국비자와 거류증등을 담당하는 사무실들이 5∼6개 있었다.
우선 가장 큰 사무실로 들어 갔다.그곳은 비자업무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경찰복장의 한 사내에게 「인감도장」을 어디서 담당하느냐고 물었다.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옆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여기서 도장업무를 취급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질문을 받은 사내는 『아니오.저쪽 대문입구에 있는방으로 가보시오』했다.대문입구 방에서는 다시 『아닙니다.저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방입니다』며 귀찮다는듯 손가락을 들어 일러줬다.
이렇게 되자 도대체 왜 이처럼 틀리게 가르쳐주는지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겠지」하며 귀퉁이방으로 들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맨 처음 내가 들렀던 방을 다시 가리켰다.이렇게 몇차례를 돌다가 두번째로 들렀던 방을 다시 찾아갔다.
『여기서 인감도장문제를 취급합니까』라고 묻자 또 대문쪽으로 가라고 했다.
『당신이 가보라해서 그곳에 가봤는데 여기서 담당한다고 합니다』
결국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경찰이 『뭣때문에 시끄럽냐』고 자기 동료에게 물었다.도장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난 이 사내가 말했다.『아,그거 내가 담당하는데…』
이같은 이상한 경험은 나뿐아니라 당시 특파원상주를 준비중이었던 다른 한국기자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었다.모방송사의 한 기자는 무슨 서류에 경찰의 도장을 받아오라는 요청에 따라 경찰서를 찾고 또담당부서를 찾는데 꼬박 하루를 보냈다.담당부서에서 그 도장은 파출소에서 취급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할파출소를 찾는데 또 하루를 보냈는데,그는 조선족 동포의 안내를 받았음에도 그 모양이었다.
이같은 일은 경찰뿐아니었다.하루는 전기퓨즈를 사러 백화점에 가서 정문 안내 아가씨에게 어디서 파느냐고 물었다.이 안내양은 거침없이 지하2층으로 가라고 했다.눈을 씻고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아 한 판매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지상3층에 가면 살 수 있다고 했다.그런가 하고 달려가 보았으나 역시 전기퓨즈는 찾을 길이 없었다.결국 이 백화점에는 퓨즈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문을 나오면서 안내양에게 『이 백화점에는 퓨즈가 없는데 왜 지하 2층이라고 일러줬느냐』며 시비조로 얘기를 하자 눈썹 하나 까딱 않은채 『그렇던가』라고만 대꾸했다.
특파원상주 준비중 호텔에 머물고 있을때 한 조선족 동포에게 신화통신을 받아보는 방법과 비용등을 알아보도록 부탁했다.그는 전화번호부를 보고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부서를 대달라고 부탁한 것같았다.그러나 그곳이 아니고 다른 곳이라며 다른 전화번호를 일러줬다.하지만 그곳도 아니었다.이렇게 해서 약 한시간동안 꼭 9번째 전화다이얼을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대체로 무책임했다.자기 말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몰라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고 꼭 아는체 해서 사람을 골탕먹였다.
이같은 언행습관은 무엇때문에 생겨났는가.40여년에 걸린 사회주의때문인가.아니면 5천년 중국역사의 소산인가.우리 한국기자들은 사회주의체제상의 형식주의 영향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추정은 했으나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려웠다.다만 주해에 진출한 한 한국업체대표가 일러준 『이곳 중국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다짐과 확인을 거듭하고 만일의 사태에 항시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잊을 수가 없다.<북경특파원>
북경에서 특파원생활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크게 당황했던 일로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은 인감도장을 파러 갔을때 당한 일이다.외국특파원이 전화를 신청하자면 「○○신문 북경지국」과 같은 인감도장을 파야하는데 그 절차가 꽤 까다롭다.우선 중국외교부로부터 서신을 받아 공안부 외국인관리처에 가서 신고를 한후 여기서 지정해준 도장집에서 파야 한다.
기자도 서신을 들고 북경시 천안문 뒤쪽 ㅁ자로 된 단층 기와집에 자리잡고 있는 공안부 외국인관리처를 찾아 갔다.옛날 한국 농촌의 낡은 면사무소를 연상케하는 이 관리처에는 외국인들의 출입국비자와 거류증등을 담당하는 사무실들이 5∼6개 있었다.
우선 가장 큰 사무실로 들어 갔다.그곳은 비자업무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경찰복장의 한 사내에게 「인감도장」을 어디서 담당하느냐고 물었다.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옆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여기서 도장업무를 취급하느냐』고 물었다.그러나 질문을 받은 사내는 『아니오.저쪽 대문입구에 있는방으로 가보시오』했다.대문입구 방에서는 다시 『아닙니다.저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방입니다』며 귀찮다는듯 손가락을 들어 일러줬다.
이렇게 되자 도대체 왜 이처럼 틀리게 가르쳐주는지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겠지」하며 귀퉁이방으로 들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맨 처음 내가 들렀던 방을 다시 가리켰다.이렇게 몇차례를 돌다가 두번째로 들렀던 방을 다시 찾아갔다.
『여기서 인감도장문제를 취급합니까』라고 묻자 또 대문쪽으로 가라고 했다.
『당신이 가보라해서 그곳에 가봤는데 여기서 담당한다고 합니다』
결국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경찰이 『뭣때문에 시끄럽냐』고 자기 동료에게 물었다.도장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난 이 사내가 말했다.『아,그거 내가 담당하는데…』
이같은 이상한 경험은 나뿐아니라 당시 특파원상주를 준비중이었던 다른 한국기자들도 마찬가지로 겪고 있었다.모방송사의 한 기자는 무슨 서류에 경찰의 도장을 받아오라는 요청에 따라 경찰서를 찾고 또담당부서를 찾는데 꼬박 하루를 보냈다.담당부서에서 그 도장은 파출소에서 취급한다는 얘기를 듣고 관할파출소를 찾는데 또 하루를 보냈는데,그는 조선족 동포의 안내를 받았음에도 그 모양이었다.
이같은 일은 경찰뿐아니었다.하루는 전기퓨즈를 사러 백화점에 가서 정문 안내 아가씨에게 어디서 파느냐고 물었다.이 안내양은 거침없이 지하2층으로 가라고 했다.눈을 씻고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아 한 판매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지상3층에 가면 살 수 있다고 했다.그런가 하고 달려가 보았으나 역시 전기퓨즈는 찾을 길이 없었다.결국 이 백화점에는 퓨즈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문을 나오면서 안내양에게 『이 백화점에는 퓨즈가 없는데 왜 지하 2층이라고 일러줬느냐』며 시비조로 얘기를 하자 눈썹 하나 까딱 않은채 『그렇던가』라고만 대꾸했다.
특파원상주 준비중 호텔에 머물고 있을때 한 조선족 동포에게 신화통신을 받아보는 방법과 비용등을 알아보도록 부탁했다.그는 전화번호부를 보고 신화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부서를 대달라고 부탁한 것같았다.그러나 그곳이 아니고 다른 곳이라며 다른 전화번호를 일러줬다.하지만 그곳도 아니었다.이렇게 해서 약 한시간동안 꼭 9번째 전화다이얼을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대체로 무책임했다.자기 말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몰라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고 꼭 아는체 해서 사람을 골탕먹였다.
이같은 언행습관은 무엇때문에 생겨났는가.40여년에 걸린 사회주의때문인가.아니면 5천년 중국역사의 소산인가.우리 한국기자들은 사회주의체제상의 형식주의 영향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추정은 했으나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려웠다.다만 주해에 진출한 한 한국업체대표가 일러준 『이곳 중국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을 추진해서는 안된다.다짐과 확인을 거듭하고 만일의 사태에 항시 대비해야 한다』는 말을 잊을 수가 없다.<북경특파원>
1994-10-0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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