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봉선화(외언내언)

난파 봉선화(외언내언)

입력 1993-10-06 00:00
수정 1993-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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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홍영후의 「봉선화」3절이다.『북풍한설 찬바람에/네 형체가 없어져도/평화로운 꿈을꾸는/너의 혼이 예있으니/화창스런 봄바람에/환생키를 바라노라』모진 비바람속에서 조국의 화창한 광복을 비는 마음이 구구절절 담겨져있다.

1920년 그의 나이 23세때 작곡된 이 노래는 삽시에 전국에 퍼져나갔고 일제가 이를 금지곡으로 정하자 입속에서 남몰래 부르는 노래가 되어 부르다가 들키면 간혹 투옥되거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끊임없이 애창되는 「고향의 봄」「옛동산에 올라」「성불사」「그리움」「봄처녀」등 주옥같은 명편들과 어릴때 부른 「퐁당퐁당 돌을 던져라」도 그가 지은 노래다.

뿐만아니라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 「음락계」를 창간했고 조선음락가협회를 창립,실내악의 효시인 「난파 트리오」등 문화불모였던 이 땅에 신문화를 정착시키는 기틀을 마련하면서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국가보훈처는 국가독립유공자의 친일행위에 대한 재조사에서 난파의 친일행위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던 유품을 철거하고 그에대한 내용을 삭제했다.장애자인 운보(김기창)가 일제징용을 담은 삽화 3장을 그렸다고 해서 친일구설에 휘말린 예와 비슷하다.

물론 이런 오점은 육사나 윤동주 한용운과 이상화처럼 한점 부끄럼없이 훼절치 않은 인물에 비유될수는 없다.그당시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위해」국민가요 한두편을 작곡한것이 친일이라면 불절히 살아 숨쉬는 민족혼을 노래로 달래준것은 어떤 공적인지 착잡한 감이다.

그는 1936년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단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심한 고문끝에 죽기전까지 병상에서 시달렸다.

1941년 여름 그는 평소 아끼던 연미복을 꺼내입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마치 먼 연주여행길에 오르듯이.예술가의 애국과 친일과 예술활동의 한계,그 분량속에 묘한 아이러니가 숨겨져있음을 부인할수가 없다.
1993-10-0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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