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퇴조로 노선정립 못하고 갈팡질팡/민건협·민협등 해체… 전체회원 50%로 줄어
지난해 8월10일 전대협대표로 입북했던 성용승군(23·건대 행정과)과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양이 최근 독일에 망명신청서를 제출해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성군과 박양이 망명신청을 한 것은 지난해 연말. 이들은 평양에서 재독 작곡가인 윤이상씨와 함께 베를린으로 돌아온후 지난해 11월2일 범민련사무실에서 「범청학련결성 선포식」을 가진후 베를린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때 지지세력을 확보하려 했으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베를린 유학생 7백여명중 선포식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20여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조차도 두사람이 귀국하지 않고 베를린에 남아있으려는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성군과 박양이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것은 베를린이 한때 해외 반한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베를린이 반한활동의 무대가 된 것은 64년이후 독일로 온 광원과 간호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2만여명의 한국근로자를 중심으로한 교민사회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반정부적인 성격을 띤데다 67년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그 연루자들이 남아서 활동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독일이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강한데다 동베를린주재 북한대사관이 반한활동을 부추겨 일부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친북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윤이상씨를 중심으로 한 반한인사들의 활동은 전체 교민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73년 유신후 3공퇴진을 주장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협)가 유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돼 절정기를 이뤘다. 민건협 등 반한단체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80년대 조직을 일원화,「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민협)를 구성해 활동을 벌였으며 90년 12월16일 범민련 해외본부가 구성되어 윤씨가 의장에,이민자씨(47·이빈인후과 의사)가 부의장직을 맞는 등 핵심 반한인사 20여명이 범민련에 관여하게 됐다. 90년 여름 임수경양과 함께 밀입북했던 황석영씨도 평양에서 베를린으로 와 범민련 해외본부 대변인 역할을 맡아 왔으나 그의 독선적인 언행때문에 충돌을 빚어도다 지난해 1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 범민련 부의장이었던 이민자씨는 독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범민련 노선에 환멸을 느끼고 지난해 조직과의 결별을 선언,최근 2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다녀온뒤 병원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범민련 해외본부가 결성된지 1년도 되지않아 간부들간의 반목과 이탈로 조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인 여건변화로 분석되고 있다. 해외본부의 한 간부는 『조직내의 정신적인 지주들이 노환과 이견 등으로 떠나버린데다 북한이 범민련과는 한마디 상의도없이 정책변경을 하는 바람에 조직의 존재근거가 흔들려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며 북한이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유엔에 동시가입한 예를 들었다.
범민련의 활동만 위축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독일내의 반한단체들도 90년대 들어 속속 해체되고 있다. 민건협이 지난해 해체된데 이어 민협은 지난해 11월 총회에서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의했으며 이들 단체 회원들도 속속 조직을 이탈하고 있다. 반한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그 수가 50%정도 줄어들었으며 유럽지역 반한활동의 근거지로 알려진 베를린의 경우 모임에 참가하는 인원은 1백여명이며 이중 절반이 적극 참가자,절반이 동조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일통일뒤 베를린은 이제 반한 활동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으며 베를린에서 발을 붙이려던 황석영씨가 떠나고 성군 등이 망명신청을 하게된 것도 그들이 기대했던 절대적인 호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망명신청은 한국이 독일의 망명허용 대상국에서 제외되어 있는데다 지금까지 독일이 한국인에 대해 망명을 허용한 일이 한건도 없어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베를린=이기백특파원>
지난해 8월10일 전대협대표로 입북했던 성용승군(23·건대 행정과)과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양이 최근 독일에 망명신청서를 제출해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성군과 박양이 망명신청을 한 것은 지난해 연말. 이들은 평양에서 재독 작곡가인 윤이상씨와 함께 베를린으로 돌아온후 지난해 11월2일 범민련사무실에서 「범청학련결성 선포식」을 가진후 베를린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때 지지세력을 확보하려 했으나 호응을 받지 못했다. 베를린 유학생 7백여명중 선포식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20여명에 불과했으며 이들조차도 두사람이 귀국하지 않고 베를린에 남아있으려는데 대해 비판적이었다.
성군과 박양이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것은 베를린이 한때 해외 반한활동의 근거지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베를린이 반한활동의 무대가 된 것은 64년이후 독일로 온 광원과 간호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2만여명의 한국근로자를 중심으로한 교민사회가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 반정부적인 성격을 띤데다 67년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그 연루자들이 남아서 활동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독일이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강한데다 동베를린주재 북한대사관이 반한활동을 부추겨 일부 인사들은 노골적으로 친북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윤이상씨를 중심으로 한 반한인사들의 활동은 전체 교민사회의 분위기를 주도했으며 73년 유신후 3공퇴진을 주장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협)가 유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돼 절정기를 이뤘다. 민건협 등 반한단체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80년대 조직을 일원화,「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민협)를 구성해 활동을 벌였으며 90년 12월16일 범민련 해외본부가 구성되어 윤씨가 의장에,이민자씨(47·이빈인후과 의사)가 부의장직을 맞는 등 핵심 반한인사 20여명이 범민련에 관여하게 됐다. 90년 여름 임수경양과 함께 밀입북했던 황석영씨도 평양에서 베를린으로 와 범민련 해외본부 대변인 역할을 맡아 왔으나 그의 독선적인 언행때문에 충돌을 빚어도다 지난해 1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 범민련 부의장이었던 이민자씨는 독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범민련 노선에 환멸을 느끼고 지난해 조직과의 결별을 선언,최근 2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다녀온뒤 병원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범민련 해외본부가 결성된지 1년도 되지않아 간부들간의 반목과 이탈로 조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은 국내외적인 여건변화로 분석되고 있다. 해외본부의 한 간부는 『조직내의 정신적인 지주들이 노환과 이견 등으로 떠나버린데다 북한이 범민련과는 한마디 상의도없이 정책변경을 하는 바람에 조직의 존재근거가 흔들려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며 북한이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유엔에 동시가입한 예를 들었다.
범민련의 활동만 위축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독일내의 반한단체들도 90년대 들어 속속 해체되고 있다. 민건협이 지난해 해체된데 이어 민협은 지난해 11월 총회에서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의했으며 이들 단체 회원들도 속속 조직을 이탈하고 있다. 반한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그 수가 50%정도 줄어들었으며 유럽지역 반한활동의 근거지로 알려진 베를린의 경우 모임에 참가하는 인원은 1백여명이며 이중 절반이 적극 참가자,절반이 동조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일통일뒤 베를린은 이제 반한 활동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으며 베를린에서 발을 붙이려던 황석영씨가 떠나고 성군 등이 망명신청을 하게된 것도 그들이 기대했던 절대적인 호응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망명신청은 한국이 독일의 망명허용 대상국에서 제외되어 있는데다 지금까지 독일이 한국인에 대해 망명을 허용한 일이 한건도 없어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베를린=이기백특파원>
1992-02-03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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