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실권뒤 북경·평양등서 망명생활/민정수립땐 국가원수로 추대 확실시
내전에 시달려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위해 구성된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SNC)의장을 맡은 노로돔 시아누크공(68)은 지난 41년부터 70년 친미군사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날 때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해왔던 국왕.
그는 지난 70년3월 론놀의 우익쿠데타로 축출됐다가 이 정권을 무너뜨린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1975∼78년)잠시 수도 프놈펜에 복귀한 것을 제외하고는 북경·평양·파리 등지를 전전하면서 20여년간 망명생활을 해왔다.
국왕에서 국가주석으로,죄수에서 망명게릴라지도자로의 변신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시아누크의 50년 정치역정은 캄보디아의 근세사 바로 그 자체였다.
일관성없는 태도,때로는 병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기행등이 캄보디아 비극의 원인을 제공해 왔다고 비판받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캄보디아의 얽히고 설킨 분쟁당사자들,그리고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외국세력들 모두로부터 전후캄보디아를 맡을 유일한 인물이라는 일치된 평가를 받고 있다.
내전에 시달려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위해 구성된 캄보디아 최고민족회의(SNC)의장을 맡은 노로돔 시아누크공(68)은 지난 41년부터 70년 친미군사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날 때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해왔던 국왕.
그는 지난 70년3월 론놀의 우익쿠데타로 축출됐다가 이 정권을 무너뜨린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1975∼78년)잠시 수도 프놈펜에 복귀한 것을 제외하고는 북경·평양·파리 등지를 전전하면서 20여년간 망명생활을 해왔다.
국왕에서 국가주석으로,죄수에서 망명게릴라지도자로의 변신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시아누크의 50년 정치역정은 캄보디아의 근세사 바로 그 자체였다.
일관성없는 태도,때로는 병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기행등이 캄보디아 비극의 원인을 제공해 왔다고 비판받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캄보디아의 얽히고 설킨 분쟁당사자들,그리고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외국세력들 모두로부터 전후캄보디아를 맡을 유일한 인물이라는 일치된 평가를 받고 있다.
1991-10-24 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