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볍씨 공급 중단한다는데…/65년에 첫 등장… 한땐 「기적의 쌀」로 각광/10년 풍작에 재고늘자 “천덕꾸러기”로/“수확량 많고 내병성 강하다”… 일부선 아쉬움 표시
우리나라 식량자급의 주역이었던 통일벼가 「운명의 날」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국가에 기적의 쌀로 녹색혁명을 가져다주었던 신품종 통일벼. 그러나 최근 국내에 쌀이 남아돌자 정부가 통일벼 수매량을 대폭 줄이는 것과 함께 내년에는 농가에 볍씨공급마저 전면중단키로 했다. 일반벼보다 최고 30%이상까지 수확량이 많은데다 병충해에 강해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10여년전만해도 이장들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통일벼를 심으라고 아우성을 쳤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통일벼중 85,86년산 고미에 대해서는 사료용으로 처분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비운의 처지가 됐다.
통일벼의 품종과 명칭이 생겨난 것은 지금부터 21년전인 69년.
그러나 이보다 5년전인 65년을 우리나라에 통일벼가 등장한 첫해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통일벼 모체의 하나인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 「IR8」이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로부터 시험도입된 것이 65년이기 때문이다.
인도형 열대성 작물에 속하는 IR8은 당시 기적의 쌀로 불려졌다.
이 품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64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우리 식량은 우리 힘으로 해결한다는 결의아래 범국민적으로 일대 증산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지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62년 3월에 공포된 농촌진흥법에 따라 신품종 육성과 보급 및 기술개선을 위한 쌀농사 시험연구와 지도사업이 막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큰 작용을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해주는 식량을 배급받아 연명했고 이른바 춘궁기인 보릿고개에는 절량농가들이 속출해 풀뿌리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IR8」 비서 들여와
미국은 54년에 제정된 미공법 408호(농산물 교역발전과 원조법 및 상호안전보장법)에 따라 55년부터 매년 약 4백16만6천6백여섬의 잉여양곡을 우리나라에 지원했었다.
국민생활의 안정뿐 아니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량자급이 시급했었다.
식량자급을 위해서는 품종개량이 앞서야 했으나 당시 국내 농업기술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같은 여건에서 IR8 품종의 볍씨에 이어 66년에 이와 비슷한 IR262등 2백여종의 씨앗을 들여와 국내에서의 적응 여부를 검토했다.
그 결과 IR8은 우리나라 기후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IR262는 적응성은 있으나 미질이 극히 나빠 장려품종으로도 채택되지 못했다.
농촌진흥청은 69년 6월 벼재배에 가장 문제가 되는 도열병에 강하고 키는 작지만 이삭이 많이 달리는 IR667을 보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선정한 IR66798계통을 시험논에서 재배,지역 적응성등을 검토했다.
이 결과 IR66798계통의 볍씨중 적응성에서 우수한 종자를 수원213호,214호로 이름을 붙이고 이어 수원2131호를 추가,이들 3종류를 농가 장려품종으로 결정했다. 그 이름은 똑같이 「통일」로 정했다. IR8을 들여와 시험재배를 시작한지 5년만에 신품종 통일벼를 만들어낸 것이다.
농촌진흥청은 수원2131계통 종자 10㎏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재배,종자를 4.3t(29섬)으로 늘렸고 이를 71년 전국 61개 지역에서 적응시험을 한뒤 전국 5백50여곳 2천7백50㏊에서 집단으로 재배했고 이듬해인 72년에 1만7천t의 종자를 전국에 보급했다.
이때부터 통일벼의 재배면적을 넓혀 쌀의 총생산량을 대폭 늘리기 위해 신품종벼와 일반벼에 대한 정부 수매가격에 차이를 두지 않고 또 수매가격도 크게 올리기 시작했다.
이같은 가격 지지정책과 기술보급에 의해 신품종벼의 재배면적은 급속히 늘어났으며 생산량이 일반벼보다 30%이상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쌀 생산량도 이에 따라 60년대 2천4백30만섬에서 70년대 전반에 2천7백78만섬으로 늘었고 중반에는 3천4백72만섬을 기록,드디어 자급시대를 열었고 77년에는 4천1백67만섬으로 4천만섬을 돌파했다. 77년 대풍때에는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쌀 48만6천섬을 현물차관 형식으로 빌려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쌀 생산량의증가는 재배면적 보다는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가가 그 요인이었다.
50·60년대의 식량절대부족시대에서 신품종 벼의 도입,개발로 70년대 중반에 이룩한 자급시대의 도래에 대해 당시 국민들은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금자탑」「녹색혁명의 기적」등의 찬사에 주저하지 않았다.
○외미도입 설움 씻어
해방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쌀생산량이 2천만섬 안팎에 그쳐 해마다 봄이면 보릿고개와 아사자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으나 10여년만아 재배면적은 15% 정도 늘었음에도 생산량이 2배로 증가,외미도입의 불명예와 서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쌀의 자급을 이룩하는 데까지 신품종벼의 보급 및 재배를 둘러싼 시련도 적지 않았다.
신품종벼를 처음 전국에 보급한 72년에는 8월에 대홍수로 논농사가 실패하자 농사지도기관 및 신품종벼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이 팽배했었다.
더욱이 계속된 품종개량으로 선보인 유신·밀양 22·23,수원 251·258,이리 327,통일찰벼 등이 하나같이 수확은 월등하게 많지만 밥맛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밥맛 뒤지는것이 흠
이 때문에 소비자가 잘 찾지않는 바람에 소득이 일반벼에 뒤질 수 밖에 없어 농가에서 신품종벼의 재배를 꺼리기까지 했다.
70년초에 농촌에서 나돌던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당시 신품종쌀에 대한 객관적평가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 때문에 신품종볍씨를 농가에 보급하는데 애를 먹었고 결국은 행정지시를 통해 개량볍씨의 재배를 강요했다.
이장들이 개량볍씨를 심으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녔고 이미 심어놓은 일반벼를 뽑아버리고 소독을 위해 담가놓은 일반볍씨를 쏟아버리는 극성을 부렸다.
또 지도공무원들이 모판에 신품종볍씨를 심었나 확인·조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반볍씨를 눈에 안 띄는 곳에 감추는 농가도 적지 않았고 담당공무원들은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78년에는 또다른 신품종 「노풍」이 개발돼 장기간 시험재배도 없이 전국적으로 보급됐으나 많은 지역에서 극심한 병충해를 입어 낙심한 농민들이 논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노풍피해는 결국 정부가 보상해 주었다.
이같은 우여곡절에도 당시 박정권은 강력하고 일관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갖가지 보상책과 함께 개량볍씨를 보급해 78년에는 신품종 재배면적이 전체 재배면적의 76%까지 높아졌다.
○국제수지 흑자기여
이에 81년부터는 10년연속 풍년의 주역을 맡아왔고 그때부터 외미도입은 중단됐다. 국제수지흑자에 기여한 몫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푸대접을 받고 「퇴역」을 앞두게 됐다.
연속풍작으로 정부미 재고량이 현재 적정재고(7백만섬)를 6백만섬이나 웃도는 1천3백만섬에 이르는데다 이에 따른 관리비·2중곡가제 등으로 양특적자누계가 4조원을 넘어섰고 소비자들은 양질의 일반미만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날라오는 벼멸구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서해안등 일부 지역에서는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벼를 아직도 선호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신품종벼의 보급중단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쌀농사가 하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데다 석유자원못지 않게 식량도 무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채수인기자>
우리나라 식량자급의 주역이었던 통일벼가 「운명의 날」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국가에 기적의 쌀로 녹색혁명을 가져다주었던 신품종 통일벼. 그러나 최근 국내에 쌀이 남아돌자 정부가 통일벼 수매량을 대폭 줄이는 것과 함께 내년에는 농가에 볍씨공급마저 전면중단키로 했다. 일반벼보다 최고 30%이상까지 수확량이 많은데다 병충해에 강해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10여년전만해도 이장들이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통일벼를 심으라고 아우성을 쳤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통일벼중 85,86년산 고미에 대해서는 사료용으로 처분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비운의 처지가 됐다.
통일벼의 품종과 명칭이 생겨난 것은 지금부터 21년전인 69년.
그러나 이보다 5년전인 65년을 우리나라에 통일벼가 등장한 첫해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통일벼 모체의 하나인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 「IR8」이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로부터 시험도입된 것이 65년이기 때문이다.
인도형 열대성 작물에 속하는 IR8은 당시 기적의 쌀로 불려졌다.
이 품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64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우리 식량은 우리 힘으로 해결한다는 결의아래 범국민적으로 일대 증산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지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62년 3월에 공포된 농촌진흥법에 따라 신품종 육성과 보급 및 기술개선을 위한 쌀농사 시험연구와 지도사업이 막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큰 작용을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이,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해주는 식량을 배급받아 연명했고 이른바 춘궁기인 보릿고개에는 절량농가들이 속출해 풀뿌리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IR8」 비서 들여와
미국은 54년에 제정된 미공법 408호(농산물 교역발전과 원조법 및 상호안전보장법)에 따라 55년부터 매년 약 4백16만6천6백여섬의 잉여양곡을 우리나라에 지원했었다.
국민생활의 안정뿐 아니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식량자급이 시급했었다.
식량자급을 위해서는 품종개량이 앞서야 했으나 당시 국내 농업기술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같은 여건에서 IR8 품종의 볍씨에 이어 66년에 이와 비슷한 IR262등 2백여종의 씨앗을 들여와 국내에서의 적응 여부를 검토했다.
그 결과 IR8은 우리나라 기후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IR262는 적응성은 있으나 미질이 극히 나빠 장려품종으로도 채택되지 못했다.
농촌진흥청은 69년 6월 벼재배에 가장 문제가 되는 도열병에 강하고 키는 작지만 이삭이 많이 달리는 IR667을 보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선정한 IR66798계통을 시험논에서 재배,지역 적응성등을 검토했다.
이 결과 IR66798계통의 볍씨중 적응성에서 우수한 종자를 수원213호,214호로 이름을 붙이고 이어 수원2131호를 추가,이들 3종류를 농가 장려품종으로 결정했다. 그 이름은 똑같이 「통일」로 정했다. IR8을 들여와 시험재배를 시작한지 5년만에 신품종 통일벼를 만들어낸 것이다.
농촌진흥청은 수원2131계통 종자 10㎏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재배,종자를 4.3t(29섬)으로 늘렸고 이를 71년 전국 61개 지역에서 적응시험을 한뒤 전국 5백50여곳 2천7백50㏊에서 집단으로 재배했고 이듬해인 72년에 1만7천t의 종자를 전국에 보급했다.
이때부터 통일벼의 재배면적을 넓혀 쌀의 총생산량을 대폭 늘리기 위해 신품종벼와 일반벼에 대한 정부 수매가격에 차이를 두지 않고 또 수매가격도 크게 올리기 시작했다.
이같은 가격 지지정책과 기술보급에 의해 신품종벼의 재배면적은 급속히 늘어났으며 생산량이 일반벼보다 30%이상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쌀 생산량도 이에 따라 60년대 2천4백30만섬에서 70년대 전반에 2천7백78만섬으로 늘었고 중반에는 3천4백72만섬을 기록,드디어 자급시대를 열었고 77년에는 4천1백67만섬으로 4천만섬을 돌파했다. 77년 대풍때에는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쌀 48만6천섬을 현물차관 형식으로 빌려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쌀 생산량의증가는 재배면적 보다는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가가 그 요인이었다.
50·60년대의 식량절대부족시대에서 신품종 벼의 도입,개발로 70년대 중반에 이룩한 자급시대의 도래에 대해 당시 국민들은 「산업혁명에 비견되는 금자탑」「녹색혁명의 기적」등의 찬사에 주저하지 않았다.
○외미도입 설움 씻어
해방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쌀생산량이 2천만섬 안팎에 그쳐 해마다 봄이면 보릿고개와 아사자 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으나 10여년만아 재배면적은 15% 정도 늘었음에도 생산량이 2배로 증가,외미도입의 불명예와 서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쌀의 자급을 이룩하는 데까지 신품종벼의 보급 및 재배를 둘러싼 시련도 적지 않았다.
신품종벼를 처음 전국에 보급한 72년에는 8월에 대홍수로 논농사가 실패하자 농사지도기관 및 신품종벼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이 팽배했었다.
더욱이 계속된 품종개량으로 선보인 유신·밀양 22·23,수원 251·258,이리 327,통일찰벼 등이 하나같이 수확은 월등하게 많지만 밥맛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밥맛 뒤지는것이 흠
이 때문에 소비자가 잘 찾지않는 바람에 소득이 일반벼에 뒤질 수 밖에 없어 농가에서 신품종벼의 재배를 꺼리기까지 했다.
70년초에 농촌에서 나돌던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당시 신품종쌀에 대한 객관적평가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이 때문에 신품종볍씨를 농가에 보급하는데 애를 먹었고 결국은 행정지시를 통해 개량볍씨의 재배를 강요했다.
이장들이 개량볍씨를 심으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녔고 이미 심어놓은 일반벼를 뽑아버리고 소독을 위해 담가놓은 일반볍씨를 쏟아버리는 극성을 부렸다.
또 지도공무원들이 모판에 신품종볍씨를 심었나 확인·조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반볍씨를 눈에 안 띄는 곳에 감추는 농가도 적지 않았고 담당공무원들은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78년에는 또다른 신품종 「노풍」이 개발돼 장기간 시험재배도 없이 전국적으로 보급됐으나 많은 지역에서 극심한 병충해를 입어 낙심한 농민들이 논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노풍피해는 결국 정부가 보상해 주었다.
이같은 우여곡절에도 당시 박정권은 강력하고 일관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갖가지 보상책과 함께 개량볍씨를 보급해 78년에는 신품종 재배면적이 전체 재배면적의 76%까지 높아졌다.
○국제수지 흑자기여
이에 81년부터는 10년연속 풍년의 주역을 맡아왔고 그때부터 외미도입은 중단됐다. 국제수지흑자에 기여한 몫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푸대접을 받고 「퇴역」을 앞두게 됐다.
연속풍작으로 정부미 재고량이 현재 적정재고(7백만섬)를 6백만섬이나 웃도는 1천3백만섬에 이르는데다 이에 따른 관리비·2중곡가제 등으로 양특적자누계가 4조원을 넘어섰고 소비자들은 양질의 일반미만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날라오는 벼멸구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서해안등 일부 지역에서는 병충해에 강한 신품종벼를 아직도 선호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신품종벼의 보급중단이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쌀농사가 하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데다 석유자원못지 않게 식량도 무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채수인기자>
1990-11-26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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