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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꽁초·자전거·쓰레기… 모욕받는 항일 유적지

[기획]꽁초·자전거·쓰레기… 모욕받는 항일 유적지

홍인기 기자
홍인기 기자
입력 2016-08-14 22:34
업데이트 2016-08-1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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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곳곳 독립운동 증거들 방치…표지석만 덩그러니 “뭔지도 몰라”

외국인 “설명없어… 이 돌이 뭐죠”
관련 유적지 21%만 보존·복원


“독립운동 유적지인 줄 몰랐어요. 이게 표지석이라구요?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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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세우고…
자전거 세우고…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가 무관심 속에 의미를 잃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독립문역 사거리에 있는 독립회관 터 표지석은 자전거 주차장이 됐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흡연 장소로…
흡연 장소로…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가 무관심 속에 의미를 잃고 있다. 중구 명동성당 앞 이재명 의사의 의거지 표지석 근처에 한 시민이 담배꽁초를 버리고 있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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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으로…
쓰레기장으로…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가 무관심 속에 의미를 잃고 있다. 이회영·이시영 선생의 여섯 형제 집터와 이회영 선생 흉상이 있는 중구의 한 공원엔 쓰레기 더미가 널브러져 있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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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받침대로…
음료수 받침대로…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가 무관심 속에 의미를 잃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23인이 모였던 종로구 가회동 손병희 선생 집터 표지석에는 음료수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14일 오후 3시쯤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 독립운동가 이재명(1886~1910) 의사의 의거지를 기리는 표지석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시민은 “독립운동 유적지인 것을 아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짜증을 내며 답했다. 이재명 의사가 1909년 12월 22일 친일파 이완용을 칼로 찌른 후 “오늘 나는 원수를 갚았으니 통쾌하다”고 외쳤던 장소는 수많은 담배꽁초와 새똥으로 얼룩져 있었다.

10분 뒤 또 다른 시민들이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있는 표지석 주변으로 모여들더니 역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꽁초는 자연스레 표지석 주변에 버렸다. 명동을 찾은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도 시민들이 모여 흡연하는 모습에 덩달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표지석 위에 마시던 커피를 올려 놓은 채였다.

서울 곳곳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항일유적지가 흡연 장소나 자전거 주차장으로 전락했다. ‘금연지역’이라는 푯말도 무색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욕볼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을 절로 갖게 만들 만큼 항일 독립운동의 증거들은 몰지각한 후세에 의해 참담한 모욕을 겪고 있었다. 항일유적지 표지석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외국어 표기도 전혀 없었고 위치를 찾기도 힘들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관광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곳이 너무 많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항일유적지 표지석을 커피나 쇼핑 가방을 올려 두는 탁자 정도로 이용했다.

이재명 의사 의거지에서 100m 떨어진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돼 있으나 ‘금연구역’이라는 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담배를 피우는 시민이 많았다. 표지석과 이회영(1867~1932) 선생의 흉상 주변에는 버리고 간 음료수 페트병 등 각종 쓰레기가 꽤 있었다. 이회영 선생과 그 형제들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자 광복군의 밑거름이 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이들 외에 서울 명동에는 토지조사 사업으로 농민의 땅을 가로챈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1892~1926) 열사 동상 및 의거 터 등 대여섯 곳의 항일운동 유적지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방치되거나 훼손·변형된 상태다.

지난 12일 오후 2시쯤에 들른 독립문역 사거리의 ‘독립회관 터 표지석’은 자전거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독립회관은 독립투사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로,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되다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길 건너편 서대문형무소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형무소의 역사와 시설을 자세히 설명하는 1m 크기의 설명 표지판이 서 있는 것과 대조를 이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방문한 시민 장모(38)씨는 “독립회관이라면 아이들에게도 보여줄 만한 역사적인 장소인 셈인데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설명판이나 조형물 등을 설치해야지 작은 표지석으로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변변한 설명도 없는 표지석은 그냥 돌덩어리로 비쳐질 뿐”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쯤에 찾은 종로구 북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19년 3·1운동 직전에 독립선언서 3000장을 학생들에게 나눠 줬던 ‘유심사’ 터는 표지석마저 없고 안내 표지만 벽에 붙어 있었다. 독립협회 부의장을 지냈던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집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손병희(1861~1922) 선생의 집터, 여운형(1886~1947) 선생이 머물렀던 계동 집터 등의 표지석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손에 든 커피나 음료, 쇼핑백 등을 올려 두는 받침대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서울시나 종로구가 발행한 북촌 관광 가이드북에는 여운형 선생 집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항일유적지가 표시돼 있지 않았다. 홍콩인 관광객 줄리아(22·여)는 기자의 설명에 “돌만 있고 외국어 표기는 없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인지 몰랐다. 설명을 잘해 놓는다면 한옥의 아름다움과 함께 아픈 역사를 이겨낸 한국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이 2010년 항일유적지 1585곳을 조사한 결과 원형보존·복원된 곳은 187곳(21.3%)뿐이었고, 868곳은 멸실됐으며 521곳은 변형됐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2016-08-1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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