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

‘로렐’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2006년 2월 미국 뉴저지주 경찰 로렐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은 연인 스테이시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고통의 크기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로렐은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것이다. 스테이시가 배우자 자격으로 자기 연금을 수령해 두 사람의 추억이 깃든 집에 계속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죽기 얼마 전까지 로렐은 뉴저지 오션카운티 의회와 싸웠다. 처음에 의회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테이시는 로렐의 법적 동거인이었지만, 두 사람이 부부로 인정받지 못했던 탓이다. 의회는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동성 커플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로렐 혼자 의회에 맞선 것은 아니다. 그녀를 도운 사람이 적지 않았다. 경찰 동료 데인, 스스로를 유대인 중산층 게이라고 소개하는 인권 운동가 스티븐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이 시위에 앞장서지 않았다면 의회는 원래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암이 온몸에 퍼진 로렐에게는 투병이 곧 투쟁이었다. 의회가 태도를 바꾸기 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이제까지 해 온 모두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다. 그녀는 악착같이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한데 트레이시는 좀 난감한 입장이지 않았을까. 로렐이 그녀에게 연금을 남겨 주려던 까닭은 세상에 혼자 남을 정인이 걱정돼서다. 하지만 이것을 아주 나쁘게 보면 어떨까.

가난한 자동차 정비공 트레이시가 유능한 경찰로 승승장구하던 로렐의 유족 연금을 갖기 위해 저러는 것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다. 열아홉 살이나 어린 여자가 애인의 돈을 노린 것이라는 세간의 비난이 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잘할 수 있고, 꼭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낮에는 직장에서 병원비를 벌고, 밤에는 로렐의 투병을 돕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시킨 행동이다. 연금 따위야 어찌 됐든 로렐과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트레이시는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그녀가 의회 설득 연설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추측은 이렇다. 로렐이 자신에게 주려는 연금이 단순한 돈이 아님을 트레이시가 깨달았다고 말이다. 연금은 20여년간 경찰로 근무한 로렐의 역사가 축적된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연금은 지금 당장 필요하고, 앞으로도 가장 필요할 ‘로렐(과)의 시간’을 담은 대리물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은 소중한 로렐의 유산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트레이시는 생각한 것 같다. 마침내 의회는 연금 양도를 승인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미국은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한국은? 동성 결혼 합법화는커녕 동성 동거인 제도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 수많은 ‘로렐(들)’의 문제 제기와 그를 향한 여러 지지와 응원이 그곳으로 가는 기간을 단축할 것이다. 거기에 오늘보다 더 나은 사회가 있다. 7일 개봉. 15세 관람가.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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