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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염전 노예 그 후 1년] 아는 형에게 속아 염전으로… 2년 뼈빠지게 일했지만 손엔 담뱃값만…

[단독] [염전 노예 그 후 1년] 아는 형에게 속아 염전으로… 2년 뼈빠지게 일했지만 손엔 담뱃값만…

최훈진 기자
입력 2015-04-07 23:48
업데이트 2015-04-08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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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시설에 정착한 이들의 사연

7일 전남 무안군의 한 노숙인 재활시설. 황토밭을 지나 언덕배기를 10여분 올라가자 시설 이름이 적힌 나무 팻말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지난해 2~4월 신안군 신의도에서 구출된 ‘염전 노예’ 피해자 가운데 9명이 머물렀다. 하지만 1년이 흐른 지금 3명만 남았다. 오모(가운데·36·지적장애 3급)씨도 그중 한 명이다. 오씨는 중학교 졸업 후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1년간 일했다. 돈을 만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월급을 고스란히 챙겨 갔다. 공장에서는 동료들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았다. 오씨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와 서울 영등포역 근처에서 노숙을 했다. ‘아는 형’(직업소개소 브로커)이 일자리를 준다고 해 목포에 갔다. 이때까지 염전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염전은 ‘지옥’이었다. 난폭한 주인과 ‘염부장’(염전 주인 대신 지적장애가 있는 염부들에게 작업 지시)을 만났다. 조금만 일이 서툴러도 손바닥과 주먹이 날아왔다. 염전에서 일한 2년간 받아야 했을 임금은 약 2000만원이지만 오씨 손에 쥐여진 건 담뱃값이 전부였다. ‘염전 노예’ 사건이 불거진 후 경찰의 도움으로 오씨도 자유를 찾았다. 20년 만에 경기 동두천에 사는 아버지와 형을 만났지만 가족들은 지적장애가 있는 오씨를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서울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머무르다가 무안의 시설로 옮겼다.

그는 지난 1년간 양파를 담는 망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개당 10원꼴로, 한 달에 10만원쯤 번다고 했다. 오씨가 일하던 염전 주인은 영리유인, 준사기,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오씨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발달장애인지원센터의 법률 지원을 받아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오씨를 품지 않았던 아버지는 염전 주인이 합의금 3000만원만 내놓으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무안의 고아원 출신 나경철(가명·오른쪽·49·지적장애 3급)씨는 고교 졸업 후 축산과 양봉업에 종사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에 다녔다. 서른 살이 되던 1996년, 직업소개소를 통해 목포로 내려왔다. 나씨는 지난해 4월까지 18년간 노예처럼 일했지만 사실상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염주는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나씨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1억 3000만원을 입금했다. 시설 측은 나씨가 자립하도록 돕고 싶지만 불어난 재산 탓에 또다시 나쁜 길로 빠질 가능성이 커 고심하고 있다.

백성석(가명·왼쪽·50)씨는 지적장애가 없는데도 염전에서 돈을 받지 않고 10년간 일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옷 공장, 신문 배달 등 안 해 본 일이 없지만 20대부터는 서울 종로 일대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백씨는 사회성이 매우 취약하지만 검정고시로 중·고교 졸업장을 취득할 정도로 지적 수준은 낮지 않다.

무안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무안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2015-04-0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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