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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들어갈 땐 좋은데… 뇌는 슬슬 병든다

술술 들어갈 땐 좋은데… 뇌는 슬슬 병든다

입력 2014-07-21 00:00
업데이트 2014-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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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술 권하는 사회’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해 중견기업의 영업사원이 된 신주신(가명·34)씨. 원래 술을 즐기지 않았지만, 물품을 판매하려고 구매자를 접대하는 게 일이다 보니 술자리가 업무자리나 매한가지가 됐다. 신입사원 때는 술을 마신 다음날 근무가 너무 힘겨워 눈치를 보며 적당히 마셨다. 상관도 처음에는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판매 실적이 저조하자 “이렇게 일해서 회사 다니겠어?”라며 대놓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살아남고자 신씨가 선택한 것은 사약 들이켜듯 술을 마시며 억지로 주량을 늘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의 경력만큼 술 실력도 늘어 접대 술자리를 주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때로는 접대 자리가 없을 때도 스스로 술자리를 마련해 술을 마신다. 부장은 신입사원들 앞에서 신씨를 ‘판매왕 주신(酒神)’이라고 치켜세운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어깨가 으쓱하다가도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한국이 세계 15위(세계보건기구 통계) ‘음주강국’이 된 것은 과도한 음주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탓이 크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인맥을 만들어야 하고 그 인맥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술자리다. 인사발령 등 고급 정보는 1차도 아닌 2차·3차 술자리에서 오간다. 가정과 회사에서 생긴 극심한 스트레스를 풀 곳도 마땅치 않다. 신씨처럼 영업직은 술 실력이 곧 업무실적과 직결된다. 한마디로 술 없이는 사회생활이 힘든 ‘술 권하는 사회’다.

하지만 “오늘도 마실 수밖에 없다.”라고 한탄하며 마신 술이 하루하루 몸을 갉아먹고 끝내는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뒤늦은 후회가 사회적·신체적 심장박동까지 되살리지는 못한다.

알코올 의존증 직전 단계인 알코올 남용자는 2~3일 술을 마시고 몸을 회복시키고서 다시 술을 마신다. 평일에는 많이 마시지 못하니 주말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몰아서 마신다. 간이 많이 손상돼 피로감을 빨리 느끼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지만, 이 단계가 되어서도 음주자들은 ‘나는 그저 즐기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음주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진단법에 따르면 이 정도 수준은 영락없는 알코올 남용이다.

진단 항목에서 ▲술을 반복적으로 마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몸이 안 좋은 데도 반복해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고는 자꾸 법적 문제를 일으킨다 ▲대인관계가 악화되는 데도 계속 술을 마신다 등이 지난 1년간 한 개 이상이 해당하면 알코올 남용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당’, ‘애주가’로 불리는 사람은 대부분이 알코올 남용자인 셈이다.

여기에 술을 안 마시면 불안하고 초조한 금단증상마저 생기면 알코올 의존증을 의심해야 한다. 한 번 술을 마시면 적당히 마시지 못하고 과음이나 폭음을 반복하거나, 술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이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아침에 해장술을 찾아도 마찬가지다.

음주 후 기억의 일부분이 사라지는 ‘블랙아웃’(Black Out) 현상도 위험 신호다. 소위 ‘필름이 끊긴다’고 말하는 이 현상은 알코올이 기억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인 해마에 영향을 미쳐 뇌의 정보 입력 과정을 방해할 때 생긴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저장된 정보가 없으니 출력할 정보도 없는 것이다. 필름이 끊겼다던 사람이 무사히 집을 찾아오는 것은 예전에 뇌에 저장됐던 정보를 출력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중앙병원의 조근호 원장은 “블랙아웃이 6개월에 2회 이상 나타나면 이미 술 때문에 인지기능의 저하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그 상태에서 술을 줄이지 않고 계속 마시면 10여년 후 알코올성 치매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손상된 뇌 세포는 원상회복되지만, 필름이 끊기는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다. 알코올성 치매는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 쪽에서 먼저 시작되기 때문에 화를 잘 내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등 충동조절이 되지 않는다.

10년 이상 술을 마셔온 중장년층이 어느 날 갑자기 폭음을 하면 심장박동 리듬에 이상이 생겨 급사하는 ‘휴일 심장 증후군’에 빠질 수도 있다. 휴일 심장 증후군은 평소 과음을 일삼던 사람이 휴일 전날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많은 술을 마셔 심장 기관 계통에 이상이 오는 증상을 말한다. 건강한 사람은 약간의 과음이 심장에 바로 무리를 주진 않지만, 협심증이나 고혈압 등이 있는 사람에게 과음은 치명적이다.

간도 알코올이 분해되면서 생기는 아세트알데하이드에 의해 손상을 받게 된다. 간은 이상신호가 가장 늦게 오는 ‘침묵의 장기’다. 지방간이 되어도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술을 마시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간이 굳어버리는 간경화가 올 수 있다.

소주 반 병 이상을 매일 일주일 정도 마시면 지방간, 일주일에 과음·폭음을 4번 이상 10년간 지속하면 알코올성 간염, 이를 15년 이상 지속하면 간경화의 위험이 크다. 보통 하루 소주 1병을 마시면 위험수위로 볼 수 있다. 그나마 안전한 한계 음주량은 여성이 하루 2잔, 남성이 하루 3잔이다.

알코올 의존증은 유전도 된다. 양친이 전부 알코올 중독자면 자녀가 알코올에 중독될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10배 정도 높고, 부모 중 한 명만 알코올 중독자더라도 5배가 높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상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정상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알코올 중독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보다 알코올에 중독될 가능성이 크다는 미국의 연구 결과도 있다. 자신만의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똑같이 술을 마셔도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태생적으로 적어 건강에 더 심각한 해를 입는다.

소설가 현진건은 그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마지막을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는 말로 맺는다. 하지만 세상 탓을 하며 매일 술잔을 기울이는 당신도 자기 자신한테 “몹쓸 당신”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2014-07-21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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