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33>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33>

입력 2013-05-15 00:00
업데이트 2013-05-15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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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어둑하게 가라앉았던 하늘에서 음산한 기운이 도는가 하였더니 마침내 솜털처럼 촘촘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만 내던 시절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 봄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머지않아 부지깽이만 꽂아도 싹이 난다는 3월이 닥칠 것이다. 봄 사돈 꿈에 볼까 무섭다는 말이 있는 춘궁기가 시작되면 소금값은 더욱 치솟아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일행은 처소에서 가까운 식주인을 찾아 오랜만에 요기를 배불리 하고 도방으로 돌아와 일찌감치 잠자리를 보았다. 따끈한 아랫목에 모두 목침 하나씩을 차지하고 어슥버슥 누웠는데, 문득 배고령의 신세타령이 들려왔다.



뒤통수에 패랭이 얹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한평생을 걸어도 앉아서 쉬어본 적 없네

허기진 뱃구레 움켜쥐고 고개치 넘나들다

물미장 턱에 걸고 먼 산 바래기가 낙일세

검은 머리 흰머리 될 때까지 행역에 시달려

일점 혈육도 없이 이 풍진세상 홀로 떠도네

서발 작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사고무친

병구완에 은사죽음인들 구완받을 길 없네

봉놋방 부들자리에서 생면부지 사람들과

말뚝잠으로 밤 지새다가 깨어나면 꼭두새벽

오늘도 하염없이 십이령길 고개치 넘나드네

일모도궁에 일숙 청해도 돌아오는 문전박대

꿩의 병아리같이 뛰어들 품속 어디에 없으니

사위스런 이내 속내 누굴 잡고 하소연할까

객리행상에 지쳐도 형단영척(形單影隻) 의지할 데 없는 팔자

부지거처 불구인생(不久人生) 누구를 허물하리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고해 바다 겪다가

허공에 날리는 먼지같이 저세상으로 가네

고해 바다 헤매다가 저승으로 돌아가네

심사가 뒤숭숭했던 곽개천이 나직하게 타일렀다.

“배고령, 남의 어수선한 복장 지르지 말고 그만 자세. 설친 잠이나 벌충하게.”

일행이 부들자리에 코를 박고 막 잠잘 채비를 하는 중에 초저녁에 헤어졌던 정한조가 문을 벌컥 열고 봉노 안으로 들어섰다. 누워 있던 일행이 모두 일어나 등잔에 불을 댕기고 초저녁에 숫막에서 겪었던 살풍경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색주가에서 허튼소리 몇 마디 건넸다가 무뢰배들에게 되우 당했습니다. 자칫 덧들였다간 싸다듬이로 등에 누린내가 나도록 맞을 뻔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색을 하고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정한조가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네. 증거는 없으나 임자들이 포주인 농간에 놀아난 것 같군.”

열적은 얼굴로 정한조의 기색을 살피던 박원산(朴元山)이 말했다.

“포주인 농간에 놀아나다니요?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이 몰골 숭한 꼴을 당했는데요?”

“임자들을 끌어들인 포주인의 저의가 어디 있었는지 지금 당장 내막을 헤아릴 수는 없으나 궐자의 농간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네. 장차 두고 볼 일이지만, 내성은 포주인 윤기호가 주름잡고 놀던 병문이 아닌가. 그런데 임자들은 왜 포주인을 따라 색주가 출입을 하였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위인들이란 평판 듣기 딱 알맞게 되었네. 절약이란 바늘로 흙을 떠 담는 일처럼 어렵고, 낭비는 모래밭에 물을 뿌리는 일과 같아 한번 버릇 들면 끝을 모른다 하였네. 모두 자중하게. 그렇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가 않네.”

정한조가 몇 마디 쥐어박자, 좌중은 얼음 속처럼 조용해졌다. 그때 곽개천이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요? 또 무슨 사단이 있었습니까?”

2013-05-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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