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보니까 착하다? 그거 착각이야 당신도 가해자가 되는 불편한 진실 보여주지

학원폭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계급문제를 건드린 19금(禁) 잔혹 스릴러 ‘돼지의 왕’(①)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대 화제작이었다. 1억 5000만원의 저예산에 한 번,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넷팩(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무비콜라주상을 휩쓸었다. 지난 5월 프랑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도 초청받았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 이후 시드니영화제와 뉴욕 아시안필름 페스티벌을 찍고, 지난 9일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부문상인 사토시 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첫 장편임을 감안하면 믿기지 않는 성과다. 여권에 출입국 도장 잉크가 마를 사이도 없을 텐데 연상호(34) 감독은 중편 애니메이션 ‘창’(②)을 뚝딱 만들었다. 오는 23·26일 CINDI(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에서 공개되는 ‘창’은 최전방 철책근무를 서는 군부대에서의 구타사건을 다뤘다. 동시에 사이비 종교를 다룬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③)의 대본을 끝냈다. ‘돼지의 왕’을 본 관객이라면 두 작품 모두 연상호답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 할리우드나 일본, 한국 애니메이션 어디에도 없던 소재를 어떤 실사영화보다 사실적인 터치로 표현하는 연 감독을 지난 16일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 성공으로 ‘사이비’가 너무 무난하게 투자를 받아 충격을 받았다. 2006~2010년 ‘돼지의 왕’ 투자를 받지 못해 별의 별짓을 다했다. 한때는 게임 트레일러, 광고 일감까지 모두 끊겨 스태프들을 내보내고 애니메이션도 접을까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br>도준석기자 pado@seoul.co.kr<br>


다짜고짜 일벌레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쉬지 않고 일을 맡아야 회사(스튜디오 다다쇼)가 굴러간다.”며 웃었다. “‘돼지의 왕’을 끝내고서 ‘사이비’까지 몇 달이 남더라. 예전에 내가 글을 쓰고 (‘습지 생태보고서’의) 최규석 작가가 그림을 그려 옴니버스 인권만화책에 실었던 ‘창’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29분짜리 ‘창’은 자전적 이야기다. 군기가 ‘빡센’ 최전방 철책근무 부대에 ‘관심사병’ 홍영수 이병이 들어온다. 어느 날 홍 이병이 잔머리를 굴려 군장을 꾸린 사실이 적발돼 분대 전체가 얼차려를 받는다. 분대장 정철민 병장은 홧김에 구타를 하고, 홍 이병은 자살을 시도한다. 정 병장은 연 감독의 과거다. “제대 한 달 전까지 구보 인솔하고 군가 똑바로 안 부른다고 윽박지르고 그랬다. 그런데 고문관 이등병이 들어오면서 틀어졌다. 아무것도 안 하려던 친구에게 폭력이 가해졌고, 얼마 뒤 이등병은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비로소 내가 틀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 최전방 철책, 구타, 자살시도… 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알리려고

관객은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기 마련. 하지만 ‘창’은 반대다. 군대에 다녀온 남성관객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정 병장에게 공감할지도 모른다. 연 감독은 “기존에 인권을 말하는 방식에 불만이 있었다.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가 싫었다. 거대 조직 혹은 시스템 속에서 가해자도, 피해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때론 모두가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어 “보통 인권 영화를 보는 사람은 자신은 착하다고 착각한다. 그런 면을 뒤집어 보고 싶었다. 당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또 관객이 가해자가 되는 기분을 느껴 보게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 사건으로 연 감독은 보름 동안 군 감옥에 갔다.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조직 논리에 파묻힌 내가 선이라고 생각한 게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또 조직에 충성한다고 해서 개인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했다.

군대(‘창’)와 학교(‘돼지의 왕’)란 배경은 다르다. 하지만 계급(혹은 권력)과 폭력, 먹이사슬의 하부구조인 약자끼리의 반목 등 감독의 주제의식은 여전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권선징악이 명확한 구조보다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한 딜레마 상황에 끌렸다.”면서 “밝고 명랑한 애니메이션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하록선장(‘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애꾸눈 선장)의 극장판 ‘아르카디호의 비밀’이나 ‘에어리어88’,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작품을 좋아했다.”며 웃었다.

# 박찬욱·봉준호 정도가 아니면 파리 목숨… 아직은 실사보다 애니가 좋아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의 꿈을 키웠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은 뒷전. 2학년 때 “‘야메’(뒷거래)로 (애니메이션 제작용) 프로그램을 익혀 가면서” 옥탑방과 친구 집 차고 등을 전전하며 습작을 했다. 데뷔작인 클레이(점토) 애니메이션 ‘D의 과대망상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막 치료를 끝낸 환자가 보는 창밖 풍경’은 이처럼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만들었다. 졸업 후 1년쯤 월급쟁이 애니메이터로 일하다 2004년 애니메이션 창작집단 스튜디오 다다쇼를 설립했다.

‘돼지의 왕’의 성공으로 9억원짜리 프로젝트가 된 ‘사이비’는 연상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을지도 모른다. “‘돼지의 왕’은 (표현수위가) 센 작품이란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사이비’는 내가 봐도 세다. 잔혹한 진실을 일깨우는 쓰레기 같은 남자와 현실을 호도한 채 점점 나아질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목사가 대립한다. 어떤 쪽에 감정을 이입할지 관객들이 헷갈릴 거다. 심지어 정의가 이기는데 그 결말을 받아들이기 당혹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약점으로 곧잘 스토리텔링(이야기)의 부재가 꼽힌다. 하지만 연 감독 작품은 실사로 더 어울린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서사가 탄탄하다. 그는 “실사영화를 찍자는 제안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박찬욱·봉준호 감독 정도가 아니면 영화 한 편을 온전히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애니메이션에는 대체할 수 있는 감독이 많지 않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실사영화를 찍는다면 투자·제작자에 휘둘리는 파리 목숨 신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애니메이션이 좋다. 실사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 감독이 꿈꾸는 큰 그림이 궁금했다. “(일본 만화가) 이토 준지의 작품 같은 공포·좀비물 등 장르영화를 하고 싶다. 사회파 감독으로 이미지가 굳을까 걱정이다. 소재를 제한받을 수도 있다. 지금도 내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작품을 한다면 투자·제작자들은 ‘연상호가 변했어? 왜 그런 걸 해’라고 나올 텐데 그건 싫다는 얘기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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