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꿈꾸는 좋은 세상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꿈꾸는 좋은 세상

김병철 기자
입력 2004-05-31 00:00
업데이트 2004-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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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모임이 있거나 친구들하고 놀다가 집에 들어올 때는 으레 무엇 타고 갈 거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는 주제에 교통이 불편한데 사는 게 딱해서 하는 소리라는 걸 안다.전철 타고 가다가 어디서 내리면 택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고 거기서 집까지는 택시로 십 분이면 갈 수 있는 데라고 안심을 시켜줘도 그럴 거면 처음부터 택시를 타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낮이면 그런대로 그 자리를 모면할 수가 있는데 밤이면 내 고집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내가 마치 돈을 아껴서 그러는 것처럼 택시를 잡아서 태워주고는 택시 삯을 밀어 넣어 주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전철을 즐겨 이용하는 것은 택시보다 빠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미 때문이기도 하다.전철을 잘 안 타본 사람은 내가 재미있으려고 전철을 탄단 말을 잘못 알아듣는다.물론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는 재미고 뭐고 없겠지만 내가 이용하는 시간은 그런 시간대가 아니니까 잠깐 꿀같이 단잠을 즐길 수도,선반에 버리고 간 공짜 신문을 볼 수도 있고,남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귓결에 얻어들을 수도 있다.휴대전화로 대화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이 뭐 해 먹고 사는 사람인지 대강 짐작이 가고,때로는 세상을 읽을 수도 있다.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통과한 역을 계속해서 중계방송하고 있는 월급쟁이 풍의 젊은 남자를 보고 있으면 남편노릇도 쉬운 노릇이 아니로구나,동정심이 우러난 적도 있다.전철에 이런 음흉한 재미만 있는 건 아니다.한산한 전철 속 건너편에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나하고 눈만 맞으면 방긋방긋 웃는 바람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만 내려야 할 역을 놓친 적도 있다.

일전에 있었던 일이다.밤늦은 시간의 전철 안은 한산한 편이어서 거의 다 앉아 있었다.승객이 낮 시간보다는 젊어보였지만 다들 피곤해 보였고 눈감고 있는 사람이 뜨고 있는 사람보다 많았다.그래도 전동차가 역에 설 때마다 내릴 사람은 내리고 탈 사람은 탔다.새로 탄 사람들이 다들 앉을 자리를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노인 한분만이 서있게 되었다.허리가 곧고 정정해 보이는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잡이를 잡았다.노인 앞에 앉아 있던 청년이 얼른 일어서면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노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아니,아니 괜찮아요.여긴 노약자석도 아닌데 내가 자리를 뺏는 건 경우가 아니지.”그러고는 그 앞에 서 있는 것조차도 앉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노약자석 쪽으로 옮겨갔다.

노약자석에도 빈자리는 없었다.다들 노인들만 앉아있는 한가운데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책가방을 멘 채 정신없이 골아 떨어져 있었다.학생 옆에 앉은 할머니가 학생을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노인이 질겁을 하면서 깨우지 못하게 말리고는 비틀비틀 옆 칸으로 옮겨갔다.옆 칸으로 빈 자리를 찾아 간다기보다는 이 칸은 서 있기도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고단하게 잠든 학생을 안쓰러운 듯 한 번 더 바라보고 간 노인의 인자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다.슬하에 고3짜리 손자를 두고 있을 것 같은 눈길이었다.곱게 늙은 경우 바른 노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경우라는 말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았다.

경우 바르다,경우에 맞다,경우에 어긋난다.경우가 아니다,경우를 모른다 등등 예전엔 참 많이 쓰던 말인데 요샌 통 못 들어본 말을 노인을 통해 듣고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경우라고 해야 하는지 경위라고 해야 하는지도 실은 잘 모르겠다.상식적으로 판단한 옳고 그름,공정하되 인지상정에 어긋나지 않는 가치판단,못 배운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사람 사는 평범한 이치 등을 통틀어 그렇게 말해 왔지 않았나 싶다.노인 덕에 속으로 경우라는 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그리움 같은 걸 느꼈다.

내가 꿈꾸는 좋은 세상은 내 머리 꼭대기 허공에 정의가 홀로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들 사이에 경우가 윤활유처럼 흘러 우리끼리 나름대로 반듯반듯하고 소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이다.
2004-05-31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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