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양 노주석·박지윤특파원|중국 장쑤(江蘇)성 리양(栗陽)현 대부진 남문두 고당암.우강 양기탁 선생이 68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친 임종지이다.
양기탁 선생의 외증손이자, 초대 주필로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증손인 박지윤 기자가 중국 상하이 노만구 마당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옛터를 찾아 선대의 발자취를 취재하고 있다.
상하이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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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선생의 외증손이자, 초대 주필로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증손인 박지윤 기자가 중국 상하이 노만구 마당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옛터를 찾아 선대의 발자취를 취재하고 있다.
상하이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선생이 말년(1937∼1938)을 보낸 리양은 상하이와 난징의 중간쯤에 위치한 중국 남부의 작은 마을.취재팀은 상하이∼난징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태호의 절경을 뒤로하면서 104번 국도를 타는 행로를 택했다.이싱(宜興)시에서 리양현 대부진까지 이르는 18㎞는 먼지를 뒤집어 쓰는 자갈길이었다.길이 더 나쁘던 시절에는 편도로 족히 7시간이 걸린 오지였다.
‘왜 이렇게 먼 곳까지 들어오게 됐을까.무엇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을까.’라는 취재진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트막한 언덕과 논밭 풍경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실제 우강은 당시 독립운동의 한계성에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1934년 김규식·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주석으로도 선출됐지만,노선문제로 갈등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풍광과 비슷한 이곳에 칩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취재팀은 남문두의 주욱화(56) 촌장을 길잡이 삼아 고당암을 찾았다.마을은 1994년 6월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올 당시와 완전히 달랐다.16년째 촌장을 맡고 있는 주씨의 도움없이 고당암 자리를 찾기란 불가능했다.자전거를 타고 취재팀을 인도한 주 촌장은 “어린시절 고당암에 놀러가면 선생은 자신을 조선사람이라고 밝혔으며 왜놈과 싸우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한 사실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뽕나무밭이 그늘을 제공하던 고당암은 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려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우강은 이곳에서 주로 참선을 하며 선도를 수행했다.마을 사람들은 선생에 관해 잘 몰랐던 것 같다.다만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고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은 습성이 중국인과 달라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부모들에게서 전해들었다고 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교류했기에 선생이 마을에 정착한 사연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한다.
의사 임쌍화(57)씨는 7년 전에 돌아가신 선친(임도선)으로부터 고당암에 기거하는 ‘수염이 긴 도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선생이 돌아가신 뒤 시신을 부친이 직접 염습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사인은 몸이 붓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는 일종의 홧병이었다.
구천을 떠돌던 우강의 유해는,1994년 6월 김구 선생이 직접 그린 지도 한장때문에 발견됐다.이곳을 들락거린 중국인 임한정이 김구 선생에게 죽음을 알리는 엽서를 보낸 것이 단서였다.
대부진 인민정부의 채금룡 당서기는 “중국의 루쉰(1881∼1936) 선생에 견줄 만한 위대한 한국 분이 이곳에서 한때 살았고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면서 “마을의 자랑으로 후세에 알릴 수 있도록 유허비를 세우는 등의 방안을 한국정부나 서울신문사와 논의했으면 한다.”고 적극성을 보였다.
joo@seoul.co.kr˝
2004-07-16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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