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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의 詩와 視線] 변해 가는 얼굴을 사랑하는 일/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의 詩와 視線] 변해 가는 얼굴을 사랑하는 일/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입력 2022-10-26 20:22
업데이트 2022-10-2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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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당신 늙어서 백발 되어 잠이 많아져

난롯가에서 까무룩 졸 때, 이 책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당신 눈의 부드러운 표정

그리고 그 깊은 그늘을 꿈꾸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이가 당신 기쁜 우아한

순간을 사랑했는지 당신 아름다움을

진실 혹은 거짓으로 사랑했는지, 허나

단 한 사람만 그대 안 순례자의 영혼을,

변해 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하였지.



달아오르는 난롯가에 몸을 구부리며

중얼거려 봐, 좀 슬프게, 사랑이 어떻게

높이 산위로 도망쳐 걷다가 그 얼굴을

별들의 무리 속에 감추었는지를.

―W B 예이츠 ‘당신 늙어서’ 중

멀리서 타전된 가을 사진을 바라본다. 어느 고요한 산책길. 노랗고 붉은 낙엽들이 좁은 길을 덮고 있다. 그 낙엽들은 한때 연한 연둣빛으로 수줍게 나와 숲을 채웠던 명랑한 이파리들이다. 조락의 계절은 변해 가는 것들을 생각하는 계절. 사랑하는 사람의 변해 가는 얼굴을 사랑하는 것은 이 상상의 맨 끝에 있다. 이 시는 그 낙엽이 불러온 기억이다.

시인 예이츠. 이루지 못한 사랑, 일찍 늙어 버린 조로(早老)의 사랑을 노래한 시인. 이 시를 시인은 스물일곱에 썼다. 스물넷에 모드 곤을 만나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의 청혼은 늘 거절되었다. 모드 곤은 아일랜드의 독립투사 맥브라이드를 선택한 것. 모드 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갈망은 오래 계속된다.

예이츠를 읽던 어느 가을 교실에서 학생의 당찬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요즘은 이런 사랑 이해받기 힘들어요. 싫다고 하면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정말 사랑한다면 단념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절에 따라 다른 사랑의 여러 방식들을 이야기하며, 예이츠의 사랑은 요즘 학생들이 기겁을 하는 스토커와는 좀 다른 결이라고 이야기하던 교실, 저녁 어둠이 일찍 찾아들던 날, 학생들 눈빛이 진지했다.

예이츠의 사랑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유난히 여러 단계, 여러 모습으로 상상된다. 사랑하는 이의 어린 날을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늙음을 상상하는 건 더 어렵다. 유쾌하지도 않고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늙은 사랑을 상상하며 시인은 자신 있게 말한다. 많은 이들이 당신 우아함을, 당신 아름다움을 사랑했겠지만, 그도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르고, 단 한 사람만이 당신 속에 있는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했다고, 변해 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다고. 기쁨 아니라 슬픔을 사랑했다고.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이 단언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머무는 사랑에 대한 상상일까. 늙어 초라한 몸으로 난롯가에 몸을 구부리며 세월을 더듬는 내 사랑을 떠올려 본다. 먼 훗날, 변해 가는 당신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던 나조차 죽어 사라졌을 시간을 상상한다. 이런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묻던 학생은 어디서 자기 사랑을 찾았는지, 이 가을 문득 궁금하다.
2022-10-2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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