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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몬드, 고소함에서 달콤함을 향한 여정/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아몬드, 고소함에서 달콤함을 향한 여정/셰프 겸 칼럼니스트

입력 2022-10-12 20:06
업데이트 2022-10-13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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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남들은 이해하기 힘든 직업적 기쁨의 순간 같은 게 있다. 가령 말로만 듣던 음식을 현지에서 먹게 된다거나, 식재료의 원형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순간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의도치 않게 아몬드 나무와 열매를 목격했을 때의 감격스러움은 지금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아마도 아몬드 열매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흥분하는 요리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몬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몬드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한국에서 나지 않는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흔하디흔한 아몬드에 호기심을 갖게 된 건 시칠리아의 주방에서 일을 할 때였다. 식당 메뉴 중에는 훈연한 생선이 있었는데 아몬드 열매 껍질을 태워 연기를 쐬는 게 아닌가. 생선 훈연을 그토록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처음 본 아몬드 껍질을 훈연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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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노점에서 점원이 직접 아몬드를 까서 판매하고 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노점에서 점원이 직접 아몬드를 까서 판매하고 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피스타치오와 함께 아몬드 산지로도 유명하다. 시칠리아 곳곳에서 아몬드 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아몬드 열매 수확은 마치 호두나무에서 호두 열매를 수확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먹는 아몬드 씨앗은 호두처럼 단단한 외피 속에 들어 있고, 그 겉을 과육이 덮고 있다. 호두 과육은 쓴맛 때문에 거의 쓸모가 없는데 아몬드 과육도 마찬가지다.

아몬드는 크게 쓴맛이 나는 아몬드와 단맛이 나는 아몬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쓴 아몬드는 청산가리 성분의 독성이 있기에 일상에서는 거의 만나볼 수 없다. 식용으로 재배하는 건 덜 단맛을 내는 아몬드로 2020년 기준 미국이 전 세계 생산량의 57%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캘리포니아산 아몬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쓴 아몬드는 위험하지만 산업적 용도로 일부 재배되고 있다. 단 아몬드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아몬드 향이 쓴 아몬드에는 다량 함유돼 있는데 향을 추출해 특정 식품 용도로 사용한다. 롬바르디아 지방의 쿠키 ‘아마레티’, 리큐어 ‘아마레토’의 향을 내는 데 사용한다.

아몬드의 고향은 중동의 이란 고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를 통해 지중해로 퍼져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견과류처럼 열을 가하거나 하지 않고도 자체로 고열량을 제공하고 입맛을 돋우는 식재료이기도 했다. 중세 이전까지 유럽 세계에서는 아몬드는 간식거리로만 여겨졌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 아랍의 요리법이 전해지면서 아몬드는 본격적으로 요리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아랍인들이 시칠리아와 스페인을 점령했을 당시 아몬드를 재배해 온 덕에 해당 지역에서는 아몬드를 이용한 요리가 지금도 전통요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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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카페 모습.
시칠리아 카페 모습.
아몬드를 이용한 대표적인 요리 중 하나는 아몬드 밀크다. 아몬드를 물에 불린 후 갈아 즙을 짜내 만들기에 요리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지만 중세의 귀족들은 꽤나 좋아했던 음식이다. 당시로선 흔한 식재료는 아니었기에 부유한 이들에게 아몬드 밀크는 육식을 금한 사순절 시기에 우유를 대체할 수 있는 대용품이기도 했다.

중세 상류층의 식탁엔 갖은 귀한 재료를 넣어 만든 소스가 유행했는데 소스는 오래 끓여 점성이 커질수록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오랜 시간 타지 않게 잘 저어 가며 끓여야 했고 연료도 많이 필요했다. 이런 수고를 덜 하고도 소스를 걸쭉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아몬드가 사용됐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밀가루와 버터를 증점제(점도를 높이는 물질)로 활용하기 전까지 아몬드를 곱게 갈아 만든 아몬드 페이스트는 상류층의 주방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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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페이스트를 이용한 시칠리아식 마지판인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 시칠리아의 카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아몬드 페이스트를 이용한 시칠리아식 마지판인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 시칠리아의 카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또 하나 아랍 세계가 유럽에 남겨둔 아몬드 요리의 유산은 바로 마지판이다. 아몬드 페이스트를 설탕과 함께 섞어 만든 일종의 케이크와 과자의 중간 정도 되는 당과류다. 질감이 점토와 비슷해서 이런 특성을 이용해 온갖 형태로 성형하기 쉬워 중세부터 장식용 디저트로 사용됐다. 시칠리아의 카페에 가면 과일 모양의 마지판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를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Frutta di Martorana)라고 부른다. 16세기 팔레르모의 마르토라나 수녀원에서 교황 방문을 앞두고 과일이 부족하자 임시방편으로 과일 모양 마지판으로 식탁을 치장한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제과 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한 요즘의 시선에서 보면 프루타 디 마르토라나나 독일의 마지판은 다소 조악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엔 제과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유럽의 식탁에 남은 아랍의 흔적을 상상하며 한입 간식거리로 먹기엔 더할 나위 없는 디저트다.
2022-10-1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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