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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생] ‘코드번호 5322’ 나는 노점상입니다

[취중생] ‘코드번호 5322’ 나는 노점상입니다

곽소영 기자
곽소영 기자
입력 2022-01-22 09:08
업데이트 2022-01-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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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터줏대감 김종분 할머니
노점상인으로 살아온 34년
둘째 딸 고 김귀정 열사 잃고
단속 피해 새벽에 일하기도


코로나19로 노점상 생존 기로
선거철 ‘서민’ 이미지 이용만 말고
제도권 들여와 상생 방안 찾아야


[편집자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취중생’(취재 중 생긴 일)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사건팀 기자들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담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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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온이 영하 16도까지 내려갔던 지난 18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34년간 노점상을 운영해온 김종분(83)할머니가 연탄을 떼고 있다. 곽소영 기자
아침 기온이 영하 16도까지 내려갔던 지난 18일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34년간 노점상을 운영해온 김종분(83)할머니가 연탄을 떼고 있다.
곽소영 기자
서울 기온이 영하 16도까지 내려갔던 지난 18일 오전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주인공인 김종분(83)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올해로 34년째 성동구 행당시장 앞에서 노점상을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는 철제로 된 손수레를 끌며 좁은 시장 골목을 안방처럼 누볐습니다.

상점 앞에서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상인들은 할머니를 보고 ‘이제 오셨냐’며 알아서 물건들을 건네줍니다.

할머니의 손수레 위에는 연탄과 가래떡, 손만두, 호박엿, 옥수수가 차례차례 쌓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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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전 김종분 할머니가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팥과 조 등 소분해서 판매할 곡식을 사고 있다. 오전 9시에 시장에 들르는 할머니는 한 바퀴 장을 보며 그날 매대 품목을 정한 뒤 용달차를 타고 노점으로 향한다. 곽소영 기자
지난 18일 오전 김종분 할머니가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팥과 조 등 소분해서 판매할 곡식을 사고 있다. 오전 9시에 시장에 들르는 할머니는 한 바퀴 장을 보며 그날 매대 품목을 정한 뒤 용달차를 타고 노점으로 향한다.
곽소영 기자
시장 안쪽에 위치한 식당에서 국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 뒤 왕십리로 돌아온 할머니는 밤새 얼어있던 천막을 펼쳤습니다.

“영감이 1988년도에 돌아가셨어. 애들은 크는데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평생 장사만 했는데. 그때부터 작은 다라이(대야) 하나 갖다 놓고 떡을 떼다 팔기 시작했어. 떡이 엿이 되고, 옥수수도 사고, 그렇게 가짓수가 많아진 거야.”

할머니는 노점상을 운영하며 1남 2녀를 키웠습니다.

이제는 장성한 손자·손녀들도 할머니가 매일 노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할머니의 둘째 딸은 1991년 학생 운동 당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희생된 고 김귀정 열사입니다. 할머니는 여전히 김귀정 열사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 도로 건너편에서 늘 ‘엄마’하며 달려왔어. 내가 ‘엄마 여기 없으면 어쩌려고 왔어’ 그러면 귀정이가 ‘엄마는 늘 여기 있잖아’하면서 웃어. 아직도 여기서 저 건너편을 쳐다보면 그 모습이 생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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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인 김종분(가운데) 여사가 23일 김귀정 열사 30주기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왼쪽은 당시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 독자제공.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인 김종분(가운데) 여사가 23일 김귀정 열사 30주기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있다. 왼쪽은 당시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 독자제공.
그래서 할머니는 지금의 노점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10년 전 노점상 특별 단속으로 구청에서 수시로 단속을 나올 때는 공무원들의 퇴근 시간 후인 저녁 6시에 나와 새벽까지 장사를 했습니다. 매일 살얼음판이었던 그 당시를 떠올리면 할머니는 ‘말도 못하게 단속했다’며 손사레를 칩니다.

그렇게 지켜왔던 노점에 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사람들 이동량이 줄어들면서 매출이 확 꺾인 겁니다. 바로 옆에서 꽃을 팔았던 노점은 석 달 전부터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할머니도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나이도 있고 체력도 안되고. 집에서 혼자 쉬는 것보다 장사하는 게 더 편해서 나오는 거지. 코로나가 어서 사라져야 하는데 걱정이 많아.”

코로나19 감염병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노점상을 강타했습니다. 빈곤사회연대가 지난 13일 노점상인 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월평균 노점운영 소득이 줄었냐는 물음에 101명(96.1%)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중 30.3%는 소득이 줄어든 탓에 월세나 관리비, 공과금 등을 체납했다고 답했고, 23.2%는 병원을 이용하지 못했다고 응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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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김종분 할머니가 엿, 팥, 청국장 등 판매할 물품을 매대에 진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유동인구가 줄어들면서 할머니의 노점도 타격을 받았다. 이웃 노점인 꽃 상인은 노점을 열지 않은지 오래다. 곽소영 기자
18일 김종분 할머니가 엿, 팥, 청국장 등 판매할 물품을 매대에 진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유동인구가 줄어들면서 할머니의 노점도 타격을 받았다. 이웃 노점인 꽃 상인은 노점을 열지 않은지 오래다.
곽소영 기자
문제는 줄어든 소득을 보전할 지원도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행정관리 노점상 중 신청자에 한해 소득안정지원금 50만원을 한 차례 지급했지만 등록되지 않은 노점상은 이마저도 받지 못하고 대출로 버티는 상황입니다. 많은 노점상들이 제도권 밖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입니다.

이에 노점상 단체인 민주노점상연합은 ‘노점상 생계보호 특별법’을 제정해달라는 입법 청원을 올렸습니다.

이 단체는 청원 글에서 “통계청에서 제정하는 한국표준직업분류에도 ‘직업코드 5322’가 등재돼있다”면서 “세금계산서와 영수증 발급 의무가 없어 탈세의 온상으로 호도돼 왔지만 세금을 내고 불법의 낙인을 없애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세금을 낼테니 노점상을 사회경제적 주체로 인정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지지부지하던 청원은 지난 20일 청원 마지막 날 극적으로 동의 요건인 5만명을 채워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회부됐습니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 유세 속에서 ‘서민’의 대명사로 등장한 노점상을 제도권 안으로 들여와 생존권을 보장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볼 때입니다.
곽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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